“팥쥐들의 대행진”. ‘콩쥐/팥쥐, 선/악’의 이분법에만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99 여성미술제가 타이틀로 내건 ‘팥쥐’의 의미가 뭔가 심상치 않은 것 같다. 지난 9월 4일 예술의전당에서 성대한 막을 올린 '팥쥐들의 행진'은 한국 여성미술이 지나온 자취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향방을 가늠해보는 회고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인 여성미술제이다. 여성미술이 ‘여성에 의한 미술’ 이상의 의미로 읽히고 페미니즘 미술이 화단의 중요한 한 흐름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는 이때 여성미술제 개최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다. 총 1백20여 작가가 참여해 1백40여 점의 작품을 전시해 여성미술제로는 최대규모이다.
'팥쥐들의 행진'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팥쥐로 비춰지는 여성 작가들의 현실을 풍자적으로 은유하여 붙인 제목.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보면 주체의식을 갖고 창조활동에 전념하는 직업 여성작가들은 모두가 이기적인 팥쥐들일 수밖에 없다. 역사 속의 여성대가들과 현재 활동중인 현역작가들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은 ’99 여성미술제는 그래서 팥쥐들의 행진인 것이다.
이번 여성미술제는 예술감독 밑에 각 부문별 큐레이터나 코디네이터를 두는 일반적인 대규모 전시회와 달리 5인 큐레이터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각 큐레이터들이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상호협의하에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전시회를 이루어냈다. 집단 이기를 내세우는 권력형 체제 대신에 화합과 조화에 유념하는 치유형의 대안체제로 악성 이분법을 초래한 남성적 질서의 병폐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결과이다. 미술제를 위해 1년 6개월 남짓 긴 시간을 운영위원(위원장 윤석남 외 김인순, 김홍희, 박영숙, 이혜경)과 전시기획위원(위원장 김홍희 외 김선희, 백지숙, 오혜주, 임정희)들이 머리를 맞대고 길고 긴 토론, 연구 시간을 가졌다.
전시회는 크게 ‘I부 역사전’과 ‘II부 주제전’으로 나뉜다. 양 전시 모두 5인의 전시기획위원들이 분담하여 꾸몄다. I부 역사전은 조선조부터 80년대까지의 여성미술을 다루고, II부 주제전에서는 90년대 현역들의 작업을 5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보여준다.
역사전은 다시 두 부분으로 갈라져 첫부분은 조선조 여성미술(김선희)과 20세기 전반의 근대여성미술(김홍희)을 점검한다. 과소평가되거나 잊혀진 여성작가들을 재조명함으로써 과거 여성미술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동시에 시대적 한계를 짚어보기 위하여 마련된 이 작업은 예산 부족 등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도록을 통한 지상전형식으로 전시를 대신한다. 다음은 해방공간 이후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근현대 여성미술로서 모더니즘 계열(임정희)과 민중계(백지숙, 오혜주)로 묶어 1층 특설 전시장에 진열한다. 어떠한 분위기 속에서 페미니즘 미술이 출현하게 되었는지 미술사적 배경과 형성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번 미술제의 주축을 이루는 II부 주제전은 ‘여성의 감수성’(김선희), ‘여성과 생태’(임정희), ‘섹스와 젠더’(김홍희), ‘제식과 놀이’(오혜주), ‘집속의 미디어’(백지숙)의 5개 부문으로 구성, 현단계 페미니즘 미술의 현장을 소개한다. 이 5개 주제는 현대 페미니즘 담론 및 페미니즘 미술의 핵심 개념들이자 첨예한 이슈들로, 각각의 주제는 담당 큐레이터에 의해 재해석되어 독립된 전시로 드러나며 다양성을 갖추면서도 총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결국 전시회는 1960-80년대까지의 회고전과 1990년대의 현역 주제전으로 대별된다고 볼 수 있다. 1960년-1980년대까지의 여성미술은 50년대 말 미국과 프랑스에 유학하여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해외파 작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작가들은 무비판적으로 남성양식을 수용, 기성화단을 살찌우는데 일조한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여성작가에 대한 편견이 극심했던 시대 분위기를 감안할 때 그들이 전업작가로 활동한 사실 자체만으로도 평가를 받아야 하며 특히 여성미술의 위상을 높인 점에서 그 성과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편 추상미술 일색의 시대에 형상과 내러티브로 여성미술의 독자 영역을 고수한 일부 여성작가들이 있었다. 여성의 심리적, 일상적 경험을 주제화한 이들은 ‘여성적 미술’ 의 전형을 마련해갔다. 이 가운데 1971년 결성된 ‘표현그룹’은 여성적 미술과 페미니즘 미술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여성적 자아의 표현’을 추구하기 위하여 장보기, 집과 같은 여성의 일상적 주제에 주목하면서 수예와 같은 여성적 소재도 개발하였다. 여성문제를 인식하고 여성성을 중시하였으며 그룹활동을 통해 자매애를 고취한 점에서 페미니즘 운동의 초기 사례로 인정될 수 있다.
80년대 중반 등장한 민중계 여성화가들은 본격적인 페미니즘 미술을 대두시켰다. 1985년에 결성된 ‘터’ 동인들, 1986년 '반에서 하나로'라는 전시회로 페미니즘 미술의 실질적 선두주자임을 입증했던 ‘10월 모임’ 일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여성미술연구회’(여
미연) 동인들은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는 '여성과 현실'전을 매년 개최, 현실을 외면하는 형식주의 모더니즘과 부계적 미술 전통에 도
전하였다. 이들은 또 미술이 일부 선택받은 계층의 전유물일 수 없다는 평등의식에 입각, ‘노동미술위원회’를 조직하여 계층간의 소통 및 연대의식을 고양하고 삶의 예술 강령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성별과 계급의 상호관계 및 그것의 역사적 변화를 인식, 여성의식과 사회의식에 기초한 진정한 페미니즘 미술을 대두시킨 이들의 노력으로 한국 여성미술사의 중대한 분기점이 마련될 수 있었다.
II부 주제전은 탈모더니즘의 코드로 작업하는 90년대 현역작가들의작품들을 통해 한국 여성미술의 현황을 검토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자리로 준비되었다. 90년대 작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류 속에서 다양한 양식과 장르가 혼재하는 가운데 변신을 시도한 시대였다. 모더니즘 작가들은 극단의 형식주의를 기피하고 이야기와 장식을 회복시키는 한편, 민중계 여성작가들은 사회적 관심에 덧붙여 예술과 자신의 문제로 시선을 돌리면서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미학과 양식을 대두시키고 있다. 그러나 90년대 여성미술은 무엇보다 새로운 감수성의 신세대 작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룹보다는 개별 활동에 의존하고 고급보다는 저급을 선호하며 이젤 페인팅 대신에 퍼포먼스, 설치, 테크놀로지 등 새로운 매체를 사용하면서 성, 신체, 환경, 생태, 매체 등 다양한 분야에 폭넓은 관심을 보이는 이들에 의해 한국 여성미술뿐 아니라 포스트모던 미술의 본격화와 다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II부 주제전이 5개 이슈를 통해 궁극적으로 표명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들간의 차이와 이질성이다. 이러한 이질성의 전략으로 계급구조와 이분법을 극복하려는 것이 주최측의 의도. 20대 말에서 60대 연령에 이르는 다양한 작가들의 이질적 작업을 한 공간에 펼쳐보임으로써 다양한 의미의 페미니즘은 물론, 비여성적인 것, 비페미니즘적인 것까지도 포용하는 확장된 개념의 페미니즘이 시대를 기대해 본다. 전시는 9월 27일까지 계속한다.
최이 부자 기자
출처 : 여성신문(http://www.womennews.co.kr) 200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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