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 넘치지 않는 -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킴킴 갤러리’에 대해

  차고 넘치지 않는

-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킴킴 갤러리’에 대해


                                                 현시원

1. 첨벙 

첨벙, 물이 목 위까지 차올랐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은 언제 봐도 박진감 넘친다. 사물과 사물의 의미가 벌이는 게임 한가운데에서 승부차기로도 끝나지 않을 팽팽한 긴장 관계를 이룬다. 물이 찰랑찰랑하게 어떤 경계선의 위치점에 자리 잡고자 하는 ‘정확함’이 느껴진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은 그들이 포착한 ‘상태’가 지닌 여러 면모를 전시장에 배치한다. 비교적 최근에 열린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개인전 《파라노이아 파라다이스(Paranoia Paradise)》(아뜰리에 에르메스, 2024), 2025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 《안티-셀프: 나에 반하여》에 선보인 작업들을 떠올려 보자니 20년 넘게 협업 작업을 한 이들의 존재 자체가 두 개인의 ‘상태’를 오가는 행동들의 결과다. 

상태란? 상태(狀態)는 한자로 ‘모양 상’, ‘모양 태’ 자를 쓴다. 당연히, 물질의 성질을 나타낸다. 액체, 기체, 고체 또는 전도체 등의 물질적 속성을 표현한다. 또 뇌가 제대로 작동하는가, 맛이 간 것은 아닌가 하는 개인이나 음식 따위의 문제를 포함해, 사회 전반적인 패러다임의 문제 또한 다룰 수 있다. 그런 단어가 ‘상태’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에서 이 ‘상태’들은 에너지 넘침과 에너지 고갈을 오간다. 바로 그 (또 한 번 이 단어를 쓰자) ‘상태’에서 이들의 작업은 수적으로 많지만, 넘치지는 않는다. 독특한 적정선을 이룬다. 마치 거울 위에 동전 네 개가 알아서 고정되어 있던 작업 <위안화 동전>(2025)처럼 말이다. 둘의 작업 안에서는 (세상을) 보기와 (작업을) 만들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거울을 재료로 하는 <위안화 동전>이 다른 벽면의 <편집증적 선인>(2025)이 달고 있는 수많은 눈알들을 비춰서 거울 각도에서도 다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 시각적 구조는, 거울 안의 전시로 전시라는 구조 자체를 새롭게 뒤튼다. 

이렇게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은 관객으로서 보기에, 재밌다. 이들의 작업을 볼 때면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 수평적으로 흐트러트리기의 결과와 수직적으로 위아래로 쌓기의 움직임들이 눈에 동시에 들어온다. 자수로 미니마우스 등을 그린 작업이 가로 벽을 감고, 3미터에 달하는 <코케시 탑>(2025) 서로 다른 층위와 용도로 현실에 존재하고 현실에서 사용되는 사물들은 이들의 작업에 의해 따로 또 같이 만난다. 2011년 국립극단 소극장 판의 건물 위에 배치되었던 빨강색 목욕탕 표시의 작업(Hot Mill 열탕)을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레디메이드 부호였다. 목욕탕 간판이란 뜨거운 열기와 수증기를 표현한 것 아닌가. 평평한 이미지 하나로 모락모락한 온도 감각과 만져질 듯한 촉각성을 불러일으켰던 이 온천 간판 작업,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사물의 ‘상태’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목욕탕(온천), 뜨거운 물 표시의 빨간 색. 이 산뜻한 시각성을 띠고서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은 현실의 특정한 상태를 포착하고, 그 예리한 포착의 순간들을 전시 제도 안에서 마주하게 한다.

온천 간판은 2019년 성곡미술관 개인전 《리프로스펙티브(REPROSPECTIVE)》에서도 건물 입구 간판에 붙어 있었다. 이때(2019)는 좀 더 개인 ‘전시’의 시공간적 입구로서 전시의 어법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첫인상’을 관객에게 건넸다. 또 과거의 작업들을 재제작하는 해당 전시의 방법론의 표지로서도 역할을 했다. 2011년보다 2019년의 이 온천 표시는 좀 더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8년 사이 한국에서 뜨거운 목욕탕이 사라진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둘의 작업에 깃든 ‘생경한 익숙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간판의 물리적 삶과 간판에 담긴 시각적 의미망은 현실과 무관하게 또 다른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업을 ‘생경한 익숙함’이라고 쓰고 나니 독립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 스스로를 ‘야생적인 사상가(wild thinker)’라고 칭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것은 과격함과는 다른, 현실의 날 것 그대로 상태들을 겹쳐 보는 신선한 눈이다. 둘의 작업에서 이들이 조율해 놓은 ‘상태’는 펑 하고 쉽게 터지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 작업이 된 사물로서’ 지속된다. 먼저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현실의 사물을 자기 방식대로 인식한다. 그다음 자신들의 언어와 방법론으로 사물의 모습과 성격을 뒤바꾼다. 인식과 발견, 제작과 재제작 사이에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작업이 사물, 예술, 삶의 앞모습만큼이나 뒤통수를 비롯한 측면, 후면 등 다양한 ‘면면’을 보게 한다는 점이다. (사물의, 누군가의, 세계의) 다른 면을 보게 하는 것은 놀라울까, 새로울까, 때로는 뒤로 물러서야 할 만큼 두렵기도 할까? 

사물이 예술이 될 때, 이들이 다루는 것은 비단 사물만이 아니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지속(시간)적으로 미술 작업을 한다는 행위와 미술사를, 또 공간적으로 작업의 재료들을 발견해 내는 장소로서 세계 곳곳의 도시와 서울의 상태들을 오간다. 그러면서 작업이 될 현실의 파편들을 수집한다. 이들의 작업 안에 들어와 있는 일상의 각종 사물들은 이렇게 미술하기와 미술사, 세계와 서울, 이들의 작업과 이동을 둘러싼 ‘시스템’을 만든다. 

2. 허구

‘일상의 각종 사물들’에 내가 밑줄을 친 것은, 몇 해 전 그들이 했던 킴킴 갤러리에 관련된 한 인터뷰 때문이다. 그들은 2011년 킴킴 갤러리로서 서울 종로구 계동의 모델하우스로 쓰였던 공간에서 정서영의 개인전을 ‘기획’한 후 이렇게 말했다. “정서영 작업에서 이게 작업인지 아닌지, 일상인지 작품인지, 이런 게 헷갈리는 부분이 있거든요. 모델 하우스라는 건 어차피 가짜잖아요. 그쵸? 21세기 모델 하우스가 아니라 17년 전 80년대 모델 하우스니까.” 

‘이게 작업인지 아닌지, 일상인지 작품인지’ 헷갈리는 것은 두 작가와 킴킴 갤러리가 오래 함께해 온 작가 정서영의 작업뿐만은 아니다. 이들이 운영하는 새로운 주체인 킴킴 갤러리도 공유하는 특성이었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2008년부터 ‘킴킴 갤러리’라는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소위 큐레이터로서의 작가 그 ’이상(beyond)‘의 활동을 해왔다. 작가로서 자신의 방법론으로 큐레이팅을 재정의하거나, 유사 큐레이팅 행위를 작업의 프로세스 안에 깃들인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독특한 시스템을 가진 ‘다른 갤러리’를 운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킴킴 갤러리는 ‘벽 없는 미술관(museum without walls)’과 같은 두터운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실제 갤러리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실체’가 되어 나갔다. 2008년 글래스고에서 ‘킴킴 갤러리’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했던 그들은 이후 전시, 프로그램 등의 기획과 실행, 협업을 몸소 자행해 왔다. 이들은 아뜰리에 에르메스 디렉터 안소연과의 인터뷰에서 킴킴 갤러리를 시작했던 시점을 이렇게 회고했다. “전시가 가능한 작가들은 실제 작품을 전시했지만, 예산과 운송 문제 등으로 실물 전시가 불가능한 작가들의 작품은 우리가 만든 조각에 작품 사진을 출력해 붙여서 조각처럼 만들어 전시”했다. “관객들이 그것을 갤러리라고 믿고 보길래” 다른 방식으로 갤러리를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믿음, ‘믿고 (바라) 보는’ 지속되는 시간이 그들이 만든 킴킴 갤러리라는 ‘시스템’이자 ‘전시’라는 말하기 방식 사이로 등장한다.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끝이 날 때까지, 두 작가가 만든 전시는 애초에 ‘적정한 거리를 두고 감상하기’라는 오래된 규율을 깨버린다. 관람자로서의 나는 어떤 특정한 내러티브를 지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아닌데, 한가운데 있다. 2025년 현재 AI의 전면화로 인해 아마도 소설의 3대 구성 요소였던, 인물-사건-배경이라는 층위는 변화하게 될 텐데. 그렇다면 나는 이 전시장에서 인물도 사건도 배경도 아닌 무엇이 될까?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전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킴킴 갤러리는 진짜이면서도 허구적이다. 실제 현실에 존재하며 여러 일을 했지만 허구적인 면모를 잃지 않는 것이 이들을 바라보는 흥미진진함을 잃지 않게끔 한다. 그것은 이들이 말한 ‘시스템’이라는 행동 방식에 기인하는 것일 테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2025년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노해나와의 편지에서 킴킴 갤러리에 대해 이렇게 썼다. “킴킴 갤러리는 가짜도 아니고 환상도 아닙니다. 상상 속의 것이 아닙니다. (중략) 이것은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시스템이 뭐죠? 시스템의 유일한 목적은,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보아 왔듯, 시스템의 실질적 목적이 공식적 목적과 상충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의 말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이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킴킴 갤러리가 ‘허구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로서, 이들이 불러일으키는 킴킴 갤러리의 존재가 무수히 많은 시간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들은 킴킴 갤러리에 함께하는(초대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많은 작가들의 작업이 지닌 특성에 기인한다. 그리고 또 킴킴 갤러리는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주소를 모르고 문 열고 닫는 관객들과의 약속이 부재하며 가시적이지만 어딘가 비밀스럽다. 이 모든 것들은 이들이 전시를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서 ‘추적의 원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일 듯하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나가는 것, ‘전시’의 한자 뜻처럼 모든 것을 다 펼쳐 놓는 것이 아니라, 동그랗게 말려 있는 양피지처럼 계속 새롭게 뚝딱 나타나서, 다른 활동들의 지면이 되어 주는 미지의 영역이 되어 주곤 하는, 절반의 펼침 상태다. 

이는 이들에게 전시가 ‘완성되는 구조’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움직이는 프로젝트임을 뜻한다. 재배치하고, 재해석하며 이들의 여정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빨리 실용적”으로, “경제적인, 물리적인 문제들을 극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선택하는 행위로서 가변성을 띤다. 이때 이 가변성을 질주하는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사물들은 새로운 삶들을 성취해 낸다. 핼 포스터(Hal Foster)는 “레디메이드는 미술가나 큐레이터의 의도를 넘어서는” 창조 행위“(뒤샹이 말년에 한 말이다), 즉 잠재해 있는 맥락을 여전히 끌어낼 수 있는 제시의 퍼포먼스이기도 하다”고 말하며 “레디메이드는 회화에 닥쳤던 죽음들만큼이나 많은 삶을 지녔다”고 쓴다.

3. 완벽한 동그라미

킴킴 갤러리, 그들은 ‘킴킴 갤러리’라는 이름을 붙이는 행위에도, 공간을 찾는 행위에도, 누구와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아 왔다. 그것은 묘하게 선명하고 용감무쌍하게 섬세하다. 이질적인 상태들에 익숙한 그들은 킴킴 갤러리를 만드는 데에서도 자신감 있게 미술 만들기와 보기를 즐기는 듯하다. 개방적인 이 ‘독립성의 영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언제 시작했는가가 그리 선언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2008년이라는 시점도 ‘마음에 든다’.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서도, 정치·사회적인 상황과도 크게 결부되지 않는 듯한데,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2008년의 금융위기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일부러 ‘마음에 든다’는 표현을 쓴 것은, 소비자가 아닌 상태에서, 개인의 호오(favorite)가 지닐 수 있는 힘을 말하고 싶어서다. 내가 왕이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 자두 맛 캔디를 고집하며 빨아먹을 수 있을 만큼 작아진 상태에서 깨뜨렸던 그 물질감의 ‘개인적’ 조율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집단이 개인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확신은 한국 사회의 ‘일사분란’을 가져왔다. 한강의 기적이라든가 발 빠른 변화로 이뤄낸 1980년대 이후의 변화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시간 동안 군인 출신의 대통령이 정치·사회 전반을 지배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물론,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가 현실을 말하는 방식은 매우 개인적이고, 매우 디테일하다. 담배 한 조각, 먼지 하나, 자수 실 하나와 세계 이곳저곳에서 수집하고 이동해 온 여러 사물들이 갖고 있는 '세부성‘이 작업의 힘을 만든다. 김나영의 1997–1999년 작업인 <전설>의 한 구절은 미술가 ’개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세부 묘사된 장면으로서 담겨 있다. 아르코미술관의 2025년 전시에서 펼쳐진 페이지는 다음과 같았다. 

그레고리가 어렸을 적 먼친척의 농장에 놀러갔다. 그 집 부엌에서 종이위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는데, 그 동그라미가 하도 완벽해서 마치 콤파스로 그린것 같았다. 그래서 당장 그 동그라미 그림을 먼 친척인 농장주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영문을 모르는 이 친척아저씨는  별로 달가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동그라미 그림’에 관한 이 어린 시절 그레고리의 일화는 지극히 소소하고 세밀하다. 1997년에서 1999년에 만들어진 김나영의 작업 <전설>의 일부를 꺼내온 것은 ‘영문을 모르는’ 것 그리고 ‘동그라미 그리기’에 관한 이 이야기가 어떤 요리의 냄새나 찌릿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정전기 같은 신체적 체험으로서 관객에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저희는 디테일은 좋아하는데, 이것은 종종 어떤 상황에서 걸어 나오는지 혹은 들려 나오는지의 차이를 뜻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이렇게 이야기한 두 작가의 사고가 텍스트로 물질화된 예처럼 보인다. 

자, 다시 킴킴 갤러리란 무엇인가? 킴킴 갤러리는 정의의 대상이 아니라, 추동하는 에너지 그 자체다. 시스템이란 일종의 에너지의 흐름이다. 에너지는 때때로 작은 사물들이 서로를 잠시 믿고 기대어 보는 것과 언어와 사물성, 시각성 사이가 복합적으로 섞여 들어간 유머로 나타난다. 정확히 말해,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미 미술제도, 문화사회적 조건 안에서 정의 내려지고는 하는 여러 대상들을 함몰시키지도 완전히 그 대상에 기대지도 않는다. 킴킴 갤러리는 무엇도 무너뜨리지 않고, 특정한 무엇도 세우지 않는다. 마치 공공미술을 이야기하면서 홀로코스트의 기념물을 대상으로 ‘카운터 모뉴먼트(counter monument)’라는 단어를 내세움으로써, 우리에게 남기고 세우고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제임스 영(James Young)의 글처럼, 킴킴 갤러리도 ‘킴킴 갤러리’를 통해 만들고 보고, 세계의 방대한 사물과 믿음들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를 무겁지 않게 던진다. 20세기 초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비(Monument to the Third International)> 구상과 같이 이뤄지지 않은 큰 꿈들을,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조각내고 변형된 상태로 현실화한다. 마치 2008년 처음 킴킴 갤러리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할 때, 운송 불가했던 작가의 작품들을 다르게 변화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둘은, 거대하면서도 이뤄지지 않은 개념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실재, 목표와 현실의 간극을 그 자체로서 인정하고 다룬다.

4. “일련의 흐릿한”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을 보는 나에게,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과연 ‘한국의’ ‘지정학적 한국’의 미술인가 하는 점이다. 당연히 ‘한국 미술’에 대한 단일한 답은 없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외국어이자 모국어로서의 한국어는 낯설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다. 2025년 아르코미술관의 기획전 《안티-셀프: 나에 반하여》에서 보았던 먹으로 쓴 서예 글자는 이렇게 말한다. ‘다이어리아: 원인, 증상과 치료’: 부호는 흘러내려서 8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문장은 명료한데, 표현은 묵직하다. 더 이상 미술 시간에 서예를 배우지 않는 2025년 한국/서울에서, 검은 먹물로 쓴 한국은 묘하게 코스모폴리탄적이다. 이 언어적·문화적 혼종성 역시 킴킴 갤러리라는 ‘가변적 시스템’의 한 축이다.

글을 쓰면서 기억난 것은 내가 2010년 서울 이태원에 위치했던 공간 해밀톤에서 김나영 & 그레고리의 개인전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벌레가 새를 잡는다》에서도 한을 봤다는 사실이다. 이때 전시장 가운데에도 먹으로 쓴 텍스트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새를 잡는다》가 있었다.

‘한국적‘이라고 할 때 내가 떠올리는 것은 당연 박이소를 포함해 1960년대 초중반 태생의 몇몇 작가들이기도 한데 그보다는 어떤 분위기로서의 서울, 한국 풍광이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이 갖고 있는 묘한 쾌활함은 서울과 한국의 것과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목가적이면서도 차가운, 한 개인의 행동을 천천히 관찰하고 집과 여행을 구분하지 않는 수평성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이들이 만드는 작업과 실천으로서의 이미지들은 그들이 그것이 한국이든 프랑스든 독일이든 도대체 ’개의치 않는다‘는 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들이 만든 시각적 쾌의 실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 1960년대 개념미술가들이 만들어 냈던 개념 자체를 실천의 테크닉으로 사용하고(이를테면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가 사용하는 언어들은 미니멀리즘으로서의 소거가 아니라 실제 행동을 촉발하는 실천 방식이 된다. 킴킴 갤러리처럼), 1980년대 신표현주의 화가들이 파고들었던 질감의 문제를 사물과 사물의 마찰로서 드러낸다(땅콩버터으로 그린 작품들을 보라). 이것은 미술사를 다시 읽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현실을 보기 위한 것으로서, 이 현실은 이들의 눈이 보았던 많은 것들을 소화하고, 미술로서 살아가는 생활의 방식일 것이다. <스테인리스 피카소 핀카소 온 더 비치>(2024)는 ‘못 박기’ 행위를 통해 피카소의 드로잉 이미지를 다르게 탄생시킨다. 

미술로(미술과 함께) 살아가는 한 방식으로서 킴킴 갤러리는 국내외 여러 작가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것은 플럭서스와 같은 공동 제작도, 영구적인 네트워크를 꿈꾸는 것도 아닌 ‘개인적’인 것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로 작가 우순옥은 2013년 10월 15일부터 11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서촌의 지금은 사라진 서점 가가린과 여전히 존재하는 온그라운드에서 your ground park ( A Douglas Park by U Sunok ) ‘여기 소문자와 대문자 배열 등은 우순옥 작가의 작업이므로 그대로 써주세요!’ 《Douglas Park by U Sunok》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그는 여기서 이렇게 썼다. “우연히 킴킴 갤러리 전시에서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 참가한 우순옥은 같은 시기에 열린 광주아트페어에 킴킴 갤러리가 전시한, 전혀 판매 가능한 유형의 작품이 없는 작가인 더글러스 파크, 후에 <더글러시즘>이 될 쇼케이스를 관람했다.) 영국작가 더글라스 박 더글러스 파크의 예술가로서 독특한 존재방식의 기록들을 보게 되었다. 다양한 예술가들 작품 속에 그의 마치 카메오처럼 무심한 듯 슬쩍 개입된 비-중심적 흔적들 속에서 나의 테마 ‘잠시 동안’과의 일련의 흐릿한 연대감이 느껴졌고” 라고. ‘흐릿한 연대감’과 ‘잠시 동안’이라는 표현에 이어 작가 우순옥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선명하게 서술해 나간다. 과연 이 ‘잠시 동안’ 분명히 존재했던 것, 그리고 킴킴 갤러리가 특정한 한 공간을 운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갖는 힘이 있다. 그것은 회고나 ‘존재했음’의 과거형으로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의 전시 공간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의 경로(찾아오는 길)을 특정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자유를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미리 알았던 것일까?

6. <반야(般若) 키티(Kitty Enlightenment)>(2024)

그는 킴킴갤러리를 매개로 예술가들 사이에 “지금은 잊힌 우애의 공동체”를 복원하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더글러시즘 더글라시즘의 국제주의 역시 아마도 그러한 의지의 일환일 것이다. (중략) 그의 답이 떠오르지 않는 이유도 그가 아무 말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내가 잊어버렸기 때문인지 이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에게 “우애의 공동체”에 관한, 되살릴만한 어떤 기억과 경험이 있다는 것은, 그가 그것을 위한 여정을 계속해나가는 데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장 영역과 후원 영역 모두에서 치열한 경쟁이 일상화되고 상업화의 압박이 날로 심해져만 가는 미술계에 그러한 이상이라니, 과연 실현가능한 일인가? 공간도 없는 갤러리, 상업성도 없는 작가들 몇 명이 ‘예술’을 탐하며 모였다 흩어졌다 운동한다고 해서? “나비의 날개/몇 번이나 넘는가/담장의 지붕”(마쓰오 바쇼)

글을 끝내면서 시각적으로는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반야(般若) 키티(Kitty Enlightenment)>(2024)를, 텍스트적으로는 이들의 오랜 벗이기도 한 이상길 교수의 글을 다소 길지만 인용하고자 한다. 여러 개의 조명이 달린 흰둥이 키티는 깨달음을 온몸으로 현시하듯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반(反) 야외 공간에 서 있었다. 동네(!)에 버려진 대형 조형물 키티를 주어 만든 것으로 밝혀진 이 <반야 키티>는 앞과 뒤의 표정이 다르게 ‘복원’되어 있다. 기존의 것들을 변형하고 재조합해서 다시 만드는 행위는 이제 20세기 후반 이후의 현대 미술가들만이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새롭게 끊어지고 연결되는(우리의 사고와 존재 자체가 AI로 인해 재편집되는) 낯선 문명 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을 보면서 더욱 든다. 그래서 더욱 위의 이상길이 쓴 “그렇게 생각하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킴킴 갤러리라는 존재도 어쨌든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과 믿고 보는 일을 통과하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글을 시작할 때 꼭 “첨벙, 물이 목 위까지 차올랐다.”라는 문장으로 출발하고 싶었다.

Oct. 2025

Seoul

Henri Moorish dreamstone, orification 헨리 무어풍 수석; 오리피싱 1, 2025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 〈헨리 무어풍 수석; 오리피싱 1〉(2025)은 일견 대상에 대한 타자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동양적 미학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수석을 두고, 그들은 특정 동굴이나 바위를 지시하지 않은 채 영국 조각가의 이름을 빌려 “헨리 무어풍”이라 부른다. 수석 앞에서 서구 근대 조각의 상징을 말하는 순간, 작가는 동양적 미학의 타자로서 대상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추상적 대상을 향한 투사의 가능성을 타자의 시선으로 인식한다고 해서 그 대상의 관념적 지위까지 온전히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헨리 무어 조각의 빈 공간이 지금, 여기의 시간으로부터 분리된 “개념적 촉각성”의 근거가 되는 공간임을 생각해 본다면, ‘헨리 무어풍’이라는 명명은 대상의 자율성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역설적으로 확인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에 따르면, 헨리 무어는 “머릿속에 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구체적 형태를 끄집어낼 줄 아는” 조각가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 『현대조각의 흐름』) 관념이 곧 물질로 직역된다는 의미에서 그의 조각은 돌의 촉각적 감각 아래 관념적 대상을 투사하는 수석과 다르지 않다. 즉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타자로서 수석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수석의 관념적 공간을 서구 조각의 구멍을 통해 타자의 세계와 연결한다. 그런 의미에서 ‘헨리 무어풍’ 수석은 대상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그 부정이 곧 긍정을 위한 조건으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중략 

전시 도록;《안티-셀프: 나에 반하여》에 관한 노트 Notes on 'Undoing Oneself' 에서 발췌

장지한 미술비평 

Notes on  Undoing Oneself
— Jang Jihan (Art Critic)

안티 셀프- : 나에 반하여 catalog

3 인사말
— 정병국(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5 전시 소개
9 강홍구 
53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 
103 김옥선
149 하차연
183 김지평 
218 나를 향한 진술 — ‘안티-셀프’의 조각들
— 노해나(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232 《안티-셀프: 나에 반하여》에 관한 노트
— 장지한(미술비평)
257 연계 프로그램
260 작가 소개

4 Acknowledgements
— Choung Byoung Gug (Chairperson, Arts Council Korea)
6 Exhibition Introduction
10 Kang Hong-goo
54 Nayoungim & Gregory Maass
104 Oksun Kim
150 Ha Cha Youn
184 Kim Jipyeong
224 A Statement Toward Self — Fragments from  Undoing Oneself
— Noh Haena (Curator, ARKO Art Center)
236 Notes on  Undoing Oneself
— Jang Jihan (Art Critic)
257 Exhibition-related Programs
260 About the Artists





designed by shin shin
2026. 1


작은 것으로부터 𝙒𝙝𝙚𝙧𝙚 𝙩𝙝𝙚 𝙎𝙢𝙖𝙡𝙡 𝘽𝙚𝙜𝙞𝙣𝙨 catalog


The catalog for 𝙒𝙝𝙚𝙧𝙚 𝙩𝙝𝙚 𝙎𝙢𝙖𝙡𝙡 𝘽𝙚𝙜𝙞𝙣𝙨 has been published in Jan. 2026.

At times, more emerges from the faint afterimages cast by scattered fragments than from any fully formed narrative. The works of Nayoungim & Gregory Maass, Park Hyesoo, and Choi Xooang register such moments-the subtle tremors that seep through the gaps of form and discourse. 𝙒𝙝𝙚𝙧𝙚 𝙩𝙝𝙚 𝙎𝙢𝙖𝙡𝙡 𝘽𝙚𝙜𝙞𝙣𝙨 takes as its premise the infinite possibilities held within these fragments.


▪️ 𝙒𝙝𝙚𝙧𝙚 𝙩𝙝𝙚 𝙎𝙢𝙖𝙡𝙡 𝘽𝙚𝙜𝙞𝙣𝙨
▪️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 Gallery 1, 2
▪️ Nov 19, 2025 – Feb 22, 2026
▪️ artists; Nayoungim & Gregory Maass, Park Hyesoo, Choi Xooang
▪️ Contributors: Ahn Soyeon, Jae Hwan Lim, Ji Young Shin, Nayoungim & Gregory Maass, Seewon Hyun, Yoo Chaerin, Yuki Konno

▪️《작은 것으로부터》

▪️ 경기도미술관 1, 2 전시실
▪️ 25.11.19 – 26.2.22
▪️ 참여 작가;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 박혜수, 최수앙
▪️ 글: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 신지영, 안소연, 유채린, 임재환, 콘노 유키, 현시원








탈북민 50명의 목소리, 예술이 되다…경기도미술관 '작은 것으로부터'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경기도미술관이 김나영·그레고리 마스, 박혜수 등 한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중견 작가 3팀과 함께 동시대 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전시를 마련했다.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미술관이 19일부터 경기작가집중조명 기획전 '작은 것으로부터'를 선보인다고 밝혔다.

2008년부터 함께 작업을 시작한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가능성이 촉발하는 에너지에 기초한 작업을 선보인다. 이들은 주변 환경과 유연하게 관계 맺으며 진화하는 작업 방식을 활용한다. 서로 이질적인 관계의 요소들을 조합하는 조각 설치 작업을 비롯해 4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한 킴킴 갤러리 프로젝트를 통해 예상치 못한 장면으로 뻗어나가는 예술 실천을 엿볼 수 있다.

박혜수는 발화되지 않은 미시적 감정과 구조화되지 않은 개인의 이야기를 수년간 수집·분석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선보여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탈북민 50명과 한국인 3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을 시작으로, 10여 년 동안 이어진 연작의 흐름에 위치한 두 점의 대형 설치 신작을 선보인다. 전시 공간 전체를 점유하는 작품은 작가가 수집한 소리로 만들어진 사운드스케이프와 전시 공간을 감시하는 서치라이트를 포함한다. 10m 규모의 미술관 벽면에 직접 그린 그래피티 양식의 벽화는 오예슬 작가와의 협업으로 제작됐다.

최수앙은 일상에서 물질과 시간 사이를 진동하는 반복과 수행의 리듬으로 작업을 생성해왔다. 2020년대 들어 회화 매체, 영화적 언어, 해부학 3D 모델 등을 참조해 조각적 언어를 변주하는 방식으로 축적하고 있다. 전시에서는 조각에서 나아가 총체를 살피는 작가의 현 지점을 보여주는 대형 조각 설치 신작이 출품된다. 또 조각이 내포하고 있는 시간·물질과의 상호작용을 담은 행위를 느낄 수 있는 아카이브 성격의 조각 설치, 영상 작품을 최초로 전시한다.

전시는 2026년 2월22일까지 이어지며, 자세한 내용은 경기도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기도미술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동시대 작가들이 20여 년 동안 축적해온 태도와 조형 언어를 통해 동시대 미술의 제도적 조건과 사회적 참여의 방식, 조각 매체의 본질을 살필 수 있는 기회로 마련됐다. 전시는 '작은 것'에서 출발한 작가들의 시선에서 생동하는 감각과 가능성을 관람객에게 전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시스 2025.11.19 16:35

https://www.fnnews.com/news/202511191635348399

외국인 줄 알았어! 예술가 남편이 홀로 지은 '프랑켄슈타인 하우스' 내부 공개


 '건축탐구 집-나만 지을 수 있는 집'에선 예술가 부부의 프랑켄슈타인 하우스가 소개된다. 

방송일시 : 2025년 12월 23일 (화) 밤 9시 55분, EBS1

경기도 양평, 전원주택의 성지라 불리는 이곳에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살고 있는 집이 있다?

H빔에 패널을 둘러 네모반듯하게 지어진 외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초콜릿 케이크를 떠올리게 만든다. 
마치 창고 같기도 한 이 집, 내부로 들어가면 더욱 정체를 알 수 없다는데...알쏭달쏭한 집을 만든 건축주들의 정체는?

그들은 바로 설치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아내 김나영 씨와 독일인 남편 그레고리 마스(Gregory Maass) 씨다. 
젊은 시절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서 만난 두 사람은 긴 세월을 함께하다 2004년에 결혼을 하였다. 
이후로도 15년 동안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정착 없이 살아온 부부. 그러다 몇 년 전부터 잠깐씩 머물던 한국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작업실도 지을 겸 집을 짓게 되었다.

부부는 H빔 골조를 중고로 구입하는 실용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 외장만 전문가에게 맡긴 후 내부는 손재주가 좋은 남편 그렉 씨가 담당하였다. 어릴 적부터 엔지니어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살던 120년 된 집을 직접 고쳐왔기 때문에 건축에 두려움이 없었다. 그렉 씨는 집을 짓고 나영 씨는 재정적인 부분을 관리하며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번 집 지으면 100년 이상은 보는 독일인답게 빠르지는 않더라도 견고하고 튼튼한 집이 완성되었다.

1층은 예술가 부부의 작업실로 이루어져 있어 작업에 필요한 물건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완전히 색다른 부부의 공간이 나온다. 
원룸처럼 뻥 뚫린 2층은 유럽의 고가구부터 우리 전통 자개장까지 이색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깊은 역사를 간직하는 물건들로 채워진 2층은 마치 박물관과 같다. 그 중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을 만큼 오래 간직되어 온 그렉 씨의 할머니께서 쓰던 장은 부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구다. 거기다 다락에 진열된 나무 아치는 19세기 프랑스 약국 건물의 자재로 사용되던 물건. 유럽에서 살며 때마다 모은 것들이다. 
한국의 옥침대를 개조한 나무 쇼파는 그들이 직접 리폼한 가구. 이 집은 여러 나라를 오가며 살아온 그들의 역사가 기록된 전시장이나 마찬가지다.

집의 또 다른 특징은 창이 많다는 것이다. 집안 곳곳에 있는 8개의 창들은 실내조명보다는 자연광을 더 좋아하는 부부의 취향대로 뚫은 것이다. 특히 부엌과 욕실 사이에 난 실내 창은 낮에 상대적으로 밝은 부엌을 통해 욕실로 빛이 스며들도록 설계된 것이다.

부부가 머무는 2층에서 내려가면 계단 중간에 손님을 위한 방이 나온다. 종종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해 그렉 씨가 만든 아담한 방이다. 콩댐처럼 보이는 자작나무 합판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자개장까지. 패널 집에서는 느끼기 힘든 한국의 전통적인 미다.

부부가 유럽 전역과 한국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물건과 아이디어로 조립된 낯설고 새로운 집. 
그 어떤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무의미한 부부의 집은 사람들이 가진 집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예술가 부부의 프랑켄슈타인 하우스를 <건축탐구 집>이 탐구해본다.

출처 : 뉴스버즈(newsbuzz)(https://www.newsbuzz.co.kr)

https://www.newsbuzz.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521
https://newsnine.co.kr/2025/12/22/%EA%B1%B4%EC%B6%95%ED%83%90%EA%B5%AC-%EC%A7%91-%EB%82%98%EB%A7%8C-%EC%A7%80%EC%9D%84-%EC%88%98-%EC%9E%88%EB%8A%94-%EC%A7%91/

Sara

 

Dec. 2025
Seojong

Unfucking Real @ 2013 아트선재 라운지 프로젝트 #4 《오늘의 책방》

  • 기간: 2013년 11월 12일(화) - 2014년 1월 12일(일)
  • 장소: 아트선재센터 라운지
  • 참여작가: 이미경
  • 주최: 아트선재센터
  • 기획: 사무소
2013년도 네 번째 아트선재 라운지 프로젝트는 미술관 라운지의 책방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프로젝트이다미술관의 라운지는 도심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매력적인 공공장소이다라운지는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오가는 열린 공간이지만전시장에서 전시를 관람하지 않더라도 방문객은 라운지에 들어서는 것 만으로도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특히 미술관 내에 위치한 책방에서 예술 및 인문 서적아트북잡지전시 관련 자료 등을 뒤적이며 방문객은 예술에 한층 더 매료되기도 한다이번 라운지 프로젝트는 미술관 내부에 위치한 책방이 본래의 임무에 보다 더 충실히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을 제안한다.
이미경 작가는 《오늘의 책방(The Book Store)》 프로젝트를 통해 수많은 책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각각의 책들을 시각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조형적 배열 방식에 대한 고민을 조각적 풍경으로 풀어낸다아트선재센터 라운지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사로잡는 이 구조물은 주변 공간과 잘 어우러지도록 섬세한 각도로 설치되어 마치 하나의 조각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방문객은 구조물 안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리듯 들어와 내부와 외부의 조각적 요소를 신체적으로 경험할 것이다또한 그 안에서 여러 시각 자료들을 접함으로써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을 접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미경(1966년 서울 출생)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브라운슈바익 조형 예술대학(HBK Braunschweig)에서 수학했다그는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공공성과 기능성이 강조된 작업을 해왔으며이를 통해 시각미술에 있어서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퍼블릭 퍼니처》(부산 비엔날레 바다미술제부산, 2006), 《재활용 주식회사》(아르코 미술관서울, 2007),《안양 공공예술 프로젝트》(안양, 2007), B-side(두아트서울서울, 2008), 《대학로 100번지》(아르코 미술관서울, 2009), 《아름지기 가구전》(플라토서울, 2011),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아뜰리에 에르메스서울, 2012), 《인생사용법》(문화역서울 284, 서울, 2012)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http://artsonje.org/asc/kor/main.asp

서신 Correspondence

 

안녕하세요,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 작가님,

이번 전시에서 작업에서 보이지 않은 지점을 짚어줄 수 있으면 해서 서신형식을 빌려 작업과 그 외부적인 것,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작가님이 걸어온 궤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전시에서는 그것을 ‘항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그 항해과정에서 정박했던 기점들을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 대화가 관객에게는 어느정도 공개가 될지는 아직 알수 없습니다. 이 대화가 작품에 대한 것보다는 미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드러나기를, 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공유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채원 코디네이터가 이 대화를 함께 할 예정입니다. 


노해나 드림. 

2025.05.12


Dear Nayoung Gim & Gregory Maass,

I hope this letter finds you well. I'm writing to you in this epistolary form in hopes of touching upon aspects of your work that may not be immediately visible in the exhibition—to explore your art and what lies beyond it, and to share thoughts about art itself. Perhaps we might call this the trajectory you have walked. In our exhibition, we've chosen to express this as a "voyage," and I'd love to discuss together the various ports where you've anchored during this journey.

I'm not yet certain how much of this conversation will be shared with our public. Rather than focusing solely on the works themselves, I hope this dialogue will reveal the way you view art, and that our shared reflections on art will resonate with others.

Coordinator Chaewon Lee and I will be joining this conversation together.

With warm regards,
Noh Haena
May 12, 2025



안녕하세요,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 작가님,


서신의 시작을 출판에 대한 이야기로 열어보고자 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업과 연결되는 그레고리 마스의 글을 출판한 책을 함께 선보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99년 신세대흐름전 <믹서 & 쥬서>에서 김나영 작가님은 소규모 책 『전설』을 선보였습니다. 이 책은 작가 동료들이 참여했는데요, 김순기, 이불, 김범, 그레고리 작가님 등이 싱거운 농담같은 일화, 우연으로 이루어진 픽션을 공유했고 이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일화가 미술가의 작업으로 전개되고 미술가와 미술 작품 사이를 주목한 작업은 “미술에 대한 미술이라는 구조”를 가진다고 기획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치는 마치 사무실 공간 같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 관람객에게 출판물을 보도록 유도했고요. “출판행위, 전시행위, 관람자의 열람 행위, 판매행위”로 이루어진 작업은 동료들의 이야기, 이를 출판물로 선보이고 관람객이 보는 행위까지 이어지며 미술가와 작업, 이를 유통하는 매체, 관람객과의 관계 전반을 인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믹서앤쥬서>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업은 예술가로서의 입장, 제도적인 것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개입과 같은 작업들을 선보이며 2000년대 다변화될 시각예술의 다양한 시각언어를 드러냈습니다. 전시에 참여한 콜렉티브인 MAFI는 마피라는 가상의 회사를 위한 대외홍보를 하는 설치와 퍼포먼스를,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은 전시장의 틈새를 활용하거나  “문화의 세기가 오고있다”라는 외부에 사인물을 걸어 개입으로서의 미술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작가들은 미술에 대한 시스템, 제도를 비판적으로 자각하며, 이전과는 다른 태도와 생각을 보여주었고, 이 전시는 그러한 면모를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미술 시스템에 대한 인지와 시스템의 유통과 순환을 지시하는 작업은 이후 가상의 전시공간이자 플랫폼인 킴킴갤러리에서도 이어지는 태도와 행위인 것 같네요.


  



이번 전시에서 그레고리 마스의 글, 『설사(Diarrhea-Causes, symptoms & Treatment)』는 전시장에 놓여 작품과 작품 간에 놓인 컨텍스트와 관계성을 지시하게 되는데요. 이번 협력 출판하는 나선프레스 이한범님은 예술가가 쓴 예술론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치기도 하네요. 

그동안 출판한 『Unfucking Real 쓰바 레알』,  『It’s nice to be nice, try it!』, 『Warped Flow Gadget』은 전시 기록을 위한 도록이라기보다, 독립적인 아티스트 출판물로 보이는데요. 이를테면, 『It’s nice to be nice, try it!』는 A-Z까지  인덱스로 분류되어 작업 개념의 키워드, 작품명 목록으로 배열되어 있는데요. 책의 내용을 안내하는 목차의 역할을 하기보다 알파벳 순서가 만들어내는 개념의 우연한 분류가 만들어 내는 파편화 효과, 작품 이미지의 순서를 인덱스 기준으로 오히려 뒤섞이게 하여 보는 이에게 책의 패러다임을 따르지 않고 보게 하는 분산적인 책의 경험과 같은 것이요. 

그러니까 하나의 매체로서의 책을 활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출판이라는 매체는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 걸까요?

유통과 배포가 가능한 시스템에 대한 관심으로  출판에 주목하는 것일 수도, 또 책이라는 고정된 형식을 변주하는 가운데에 새로운 형식의 발생시키는 가능성이, 혹은 일시적인 설치와 프로젝트들을 사후 기록하는 매체의 현실적인 필요성이 작용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추측해 봅니다.

이 문제는 이 출판들에 한정되지 않고 작업 전반의 방법론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지만요. 


(그레고리 마스 작가님의 텍스트와 관계된 내용은 이후에 얘기를 이어 나가보겠습니다)     


노해나 드림.

2025.05.27.


Dear Nayoung Gim & Gregory Maass,

I'd like to begin this letter with thoughts on publishing.

This exhibition features a book containing Gregory Maass's writings that connect to your work.

Looking back, in the 1999 New Generation Flow exhibition Mixer & Juicer, artist Nayoung Gim presented a small-scale book titled Legend. This publication featured contributions from contemporary art colleagues—Kim Soun-gui, Lee Bul, Kim Beom, Gregory, and others—sharing light-hearted anecdotes and chance-driven fictions. The curator explained that work where fictions develop into an artist's practice,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artist and artwork, possesses "a structure of art about art." The installation invited audiences to sit at a typical office desk and chair to peruse the publication. This work, composed of "acts of publishing, exhibiting, viewing, and selling," extended from colleagues' stories through their presentation as a publication to the audience's act of reading, making us aware of the broader relationships between artist and work, the medium that circulates them, and the audience.

The works by participating artists in Mixer & Juicer revealed diverse visual languages of the visual arts that would flourish in the 2000s, presenting pieces that addressed artists' positions and their interventions in institutional frameworks. The participating collective MAFI performed public relations for a fictional company called MAFI, while Lim Minouk & Frederic Michon utilized surplus space in the exhibition space and hung a sign outside reading "The Century of Culture is Coming," demonstrating art as intervention. This seems to represent a symbolic exhibition showcasing the emergence of artists with attitudes and perspectives different from before in Korean contemporary context—those who moved beyond the role of author and the diversity of media experimentation to critically acknowledge systems and institutions of art.

This awareness of art systems and work that points to their circulation seems to continue in the attitude and practice later seen in Kim Kim Gallery, a fictional art space and platform.

In this exhibition, Gregory Maas's text, Diarrhea—Causes, Symptoms & Treatment, is placed in the gallery to indicate the contexts and relationships between works. Hanbeom Lee of Rasun Press, who is collaborating on this publication, has expressed anticipation for this artist's art theory.

Your previous publications—Unfucking Real; It's nice to be nice, try it!; and Warped Flow Gadget—appear to function as independent artist publications rather than exhibition catalogs. For instance, It's nice to be nice, try it! is organized by an A-Z index, arranged as a list of conceptual keywords and work titles. Rather than serving as a table of contents guiding the book's content, the alphabetical ordering creates a fragmenting effect through the chance classification of concepts, scrambling the sequence of work images according to the index criteria, offering readers a dispersed book experience that doesn't follow conventional book paradigms.

It seems you're utilizing the book as a medium in itself. How does publishing as a medium reflect Nayoung Gim & Gregory Maass's practice? Is your attention to publishing driven by interest in systems capable of circulation and distribution? Or perhaps it's the possibility of generating new forms through variations on the fixed format of the book, or maybe the practical necessity of a medium to document temporary installations and projects?

This conversation is not limited to publications, but you can extend it to other thoughts.

(We'll continue our discussion about Gregory Maass's texts in a future letter.)

With warm regards,
Noh Haena
May 27, 2025


지난번 편지에서 <전설>을 언급하셔서, 전에 출판 무렵인 1999년경에 쓴 글 관련 링크를 드립니다. 질문하신 내용에 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렉도 여전히 답을 작성 중이에요.

https://nayoungim-maass.blogspot.com/2009/02/legends.html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의사소통의 수공업적인 형태이다.

설명이나 정보처럼 진실을 전하려는 것이 아닌 대신, 정보가 갖지 않는 풍부함과 서스펜스를 동반한다.  사람들 간에 이야기가 반복되고 기억되면서 전하는 사람의 흔적을 남기지만, 이야기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 화자의 감정이 배제된 정결하고 간결하게 짜인 집중된 형식을 가지게 된다.

이야기는 스스호를 완전히 소모하지 않고, 자신이 지닌 힘을 그대로 유지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다시 펼칠 수 있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이야기를 계속해 반복하는 기술을 뜻하며, 듣고 반복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짜이는 진행형이다.


전설은 미술가들에 관한 이야기의 모음이다.

이 이야기들의 특정한 모양, 구조, 방법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각 미술가의 행동, 구조 그리고 인지 가능한 시스템 사이에 유사성을 보인다.  그들의 미술과 모양, 구조, 형식이 흡사한 것을 발견하는데. 이야기와 작품에서 발견되는 그 유사성이 가지는 특이성-미술적 형식의 발견에서 전설이 유래한다. 전설에서는 각 이야기가 독립된 것이 아니라 미술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미술가의 개인정 특성 (창의성), 관심의 지속과 발전을 통해 작품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요소로, 미술가와 그들의 미술 사이에 특별한 공간을 형성하고 위치하면서 미술과 미술가라는 관습적 단위들에 의해서는 분명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것이다.


전설은 미술가와 그의 미술을 묘사하는데 주된 목적을 두지 않는다.

미술가 개인의 특이한 작업방법과 실천의 기능 조건을 찾으려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미술가들의 이름은 아무래도 좋으면서도 구속력의 가진다.

미술가의 이름은 애매모호하게 기능하며 각 이야기를 구별하고 존재의 의도와 방법, 형식을 구별한다.


Yours truly is infamously famous for not sugarcoating words, which is an absurd self-regressive statement. Confronted with 20 hidden questions rolled into 10 tricky ones, yours truly will turn chaos into order, almost like the lord almighty (commonly referred to as god).

Kim Kim Gallery is a promising subject of merit: The gallery is not unreal, it's not a fantasy, not imaginary. There are very many invisible, untouchable things, which are very real, like roughly 95 % of reality. It is a system and what is a system? The only purpose of a system is what it does, hitherto referring to the commonly observed phenomenon that the de facto purpose of a system is often at odds with its official purpose. So how is this system viable? Only by virtue of its sub-systems themselves being viable. For example the artists. (So it's in a constant state of collapse.)

A simple system has 5 components:

Operations: activities that ameliorate the environment (invented by yours truly, s. Douglasism). Coordination: protocols that arrange operations smoothly. (against self-destruction, see: insurance, inherent vice)

Delivery: management associated with resources, be it a glass of water or a Lamborghini, or both.

Development: planning for the future, understanding the present. See reality-testing.

Policy: Balancing the above, so that the above works smoothly together. To be precise: decision making between delivery and development. Yes, of course there is self-regression in it.  Yours truly kept it simple.

How did we get here?

The past does not exist anymore, it's a construction, a memory (let's say autobiographical) is a re-construction, akin to a fairy tale. Today’s knowledge, which is different from information, which is different from data, changes in a blink of an eye or faster. (No, counter-intuitively thoughts may be faster than light, see: entanglement (yours truly is totally not sure about this). Pre-internet/electronic computer age (beginning somewhere between 1950s and 90s) books are different, they don't change. Yours truly would shrivel and die instantly without them, mummify and turn into dust. We are physically surrounding ourselves with them. Our studio is an Atheneum in disguise, behind sliding wooden panels it hosts thousands of books, which yours truly will never be able to read. (that's a lie I read most of them, not all worth reading)

That was easy enough, compared to the hard problem of consciousness, which is also a system. In this case a CAS, complex adaptive system. So what is it? It's like being a living human being, for example. Bacteria of course have consciousness, but less so. Even a computer has consciousness to a certain degree, no doubt about it, psychologically and scientifically. Consciousness of a bacteria is what it is like to be a bacteria, for stones that don't work, a stone is dead matter. (Bye the bye “life” has no definition yet, so biology is a pseudo-science.) So how does such a CAS arise from dead physical matter, a big bunch of atoms, mostly H2O? The human mind is not separate from the body, (that's not entirely correct), yours truly observes a wild amalgam of monist tendencies. It is very important to understand that thought, (feelings and emotions are also to be considered thoughts/mentations) does not derive from electro-chemical processes in our body, but coincide.

We know very well how to distinguish reality from the imaginary. It's built into/is composed/transferred through many of our artworks, in psychology this method is called reality-testing. When you fall in love, the first thing which goes over-board is your reality-testing, that's normal. The only way to be happy, I don't mean satisfied, xor having an oceanic feeling xor, have power, sex, supply xor safety xor even being healthy, xor young, is to indulge in nothingness, because because (yes, twice) the above is meaningless of course. (as in not important) Forget ambition (mostly unhealthily imaginary), success (a social invention for gain). Let's look at motivation. One function of art is to make nothingnessing more interesting than art. Don't worry I still suffer physically when the latest mac computer is broken in a movie, or gangsters throw guns away after firing their last bullet. A regular Desert Eagle magnum .44 goes for 2500 to 4000 $US a pop, that stuff is expensive! Oi! No, yours truly is pro-fire arms regulations, but they are so much fun and of deadly beauty at the same time.

Kim Gallery is a part of the Erweiterter Kunstbegriffn, a neologism coined by Joseph Beuys, of whom we are no acolytes, those are mainly quite advanced in age and of bad physical hygiene to our experience, but admire his true balls of brass. There are no signs for neologisms to my knowledge so I introduce/coin/ n. Like for queefn, quarksn, Frisbeeterianismn… . ((Annotation: Please print it in a circle. Like ® or ©))

If the above seems cold to you, rest assured counter-intuitively it's quite warmhearted on another level. If Immanuel Kant's (rightfully named so) and Gautama Buddha's ubiquitous premise were of universal truth: "‘Screw un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screw unto you,’" the very few would survive, as in nobody. We are much friendlier than that.

Legends are legendary: I pass the torch on to my wife Nayoungim.

저는 말을 에둘러 하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이는 터무니없이 자기회귀적인 표현입니다. 10개의 까다로운 질문에 숨겨진 20개의 질문과 마주했을 때, 저는 혼돈을 질서로 바꿀 것입니다. 마치 전능하신 분(일반적으로 신이라고 불리는)처럼 말이죠.

킴킴 갤러리는 가치 있는 유망한 주제입니다: 이 갤러리는 비현실적이지 않고, 환상이 아니며, 상상의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대략 95%를 차지하는 것처럼, 매우 많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것들이 매우 현실적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시스템이며 그렇다면 시스템이란 무엇일까요?

시스템의 유일한 목적은 그것이 하는 일이며, 이는 시스템의 실질적 목적이 종종 공식적 목적과 상충한다는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을 지금까지 언급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은 어떻게 실행 가능할까요? 오직 그 하위 시스템들 자체가 실행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술가들처럼요. (따라서 이것은 끊임없는 붕괴 상태에 있습니다.)

단순한 시스템은 5가지 요소를 가집니다: 운영: 환경을 개선하는 활동들 (제가 발명한 것, 더글라스주의 참조). 조정: 운영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배치하는 프로토콜들. (자기 파괴에 맞서서, 참조: 보험, 내재적 결함) 전달: 물 한 잔이든 람보르기니든, 혹은 둘 다든 자원과 관련된 관리. 개발: 미래를 위한 계획, 현재에 대한 이해. 현실 검증 참조. 정책: 위의 것들이 함께 원활히 작동하도록 위의 것들을 균형 맞추기. 정확히 말하면: 전달과 개발 사이의 의사결정. 물론 그 안에 자기회귀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단순하게 유지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도달했을까요?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구성물이고, 기억은 (자서전적이라고 하죠) 재구성이며, 동화와 같습니다. 데이터와 다르고 정보와 다른 오늘날의 지식은 눈 깜짝할 사이나 더 빠르게 변합니다. (아니요, 직관과 반대로 생각은 빛보다 빠를 수도 있습니다, 참조: 양자얽힘 (저는 이것에 대해 전혀 확신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전자컴퓨터 시대 이전 (1950년대와 90년대 사이 어디선가 시작된) 책들은 다릅니다, 그것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들 없이는 즉시 쪼그라들어 죽을 것이고, 미라가 되어 먼지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그것들로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 스튜디오는 위장된 아테네움으로, 미끄러지는 나무 패널 뒤에 제가 절대 읽을 수 없을 수천 권의 책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저는 대부분을 읽었습니다, 모든 것이 읽을 가치가 있지는 않지만요)

그것은 역시 시스템인 의식의 어려운 문제에 비하면 충분히 쉬웠습니다. 이 경우 CAS, 복잡 적응 시스템이죠.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살아있는 인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박테리아도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덜하죠. 컴퓨터조차도 어느 정도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심리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그렇습니다. 박테리아의 의식은 박테리아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이며, 작동하지 않는 돌들의 경우, 돌은 죽은 물질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아직 정의가 없으므로, 생물학은 유사과학이에요.) 그렇다면 그러한 CAS가 어떻게 죽은 물리적 물질, 주로 H2O인 원자들의 큰 덩어리에서 발생할까요? 인간의 마음은 몸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정확하지 않지만요), 저는 일원론적 경향의 거친 혼합물을 관찰합니다. 생각이 (감정과 정서도 생각/정신작용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우리 몸의 전기화학적 과정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일치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상상의 것과 구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많은 예술작품에 내장되어 있고/구성되어 있고/전달되며, 심리학에서 이 방법을 현실 검증이라고 합니다. 사랑에 빠질 때, 가장 먼저 배 밖으로 나가는 것이 당신의 현실 검증이며, 그것은 정상입니다. 행복한 유일한 방법은, 만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배타적 논리합으로 대양적 느낌을 갖거나 배타적 논리합으로, 권력, 섹스, 공급 배타적 논리합으로 안전 배타적 논리합으로 심지어 건강하거나, 배타적 논리합으로 젊은 것도 아니라, 무(無)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렇습니다, 두 번) 위의 것들은 물론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야망을 잊으세요 (대부분 건강하지 않게 상상적인), 성공을 잊으세요 (이익을 위한 사회적 발명). 동기를 살펴봅시다.

예술의 한 기능은 무화(無化)를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여전히 영화에서 최신 맥 컴퓨터가 부서지거나, 갱스터들이 마지막 총알을 발사한 후 총을 버릴 때 육체적으로 고통받습니다. 일반적인 데저트 이글 매그넘44는 한 자루에 2500에서 4000달러나 합니다, 그 물건은 비쌉니다! 아이고! 아니요, 저는 화기 규제를 지지하지만, 그것들은 너무 재미있고 동시에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킴킴 갤러리는 조제프 보이스가 만든 신조어인 확장된 예술개념(Erweiterter Kunstbegriff)ⁿ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그의 추종자는 아니지만, 우리 경험상 그들은 주로 나이가 많고 개인위생이 좋지 않지만, 그의 진정한 놋쇠 같은 배짱을 존경합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신조어를 위한 기호는 없으므로 ⁿ을 도입/만듭니다. 질방귀ⁿ, 쿼크ⁿ, 프리스비교ⁿ처럼요... ((주석: 이것을 원 안에 인쇄해 주세요. ®나 © 처럼))

위의 내용이 당신에게 차갑게 보인다면, 안심하세요.

직관과 반대로 그것은 다른 차원에서 꽤 따뜻한 마음입니다. 만약 임마누엘 칸트의 (적절히 명명된) 그리고 고타마 붓다의 편재하는 전제가 보편적 진리였다면: "'네가 남들로부터 당하고 싶은 대로 남들에게 해라,'" 극소수만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즉 아무도요.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친근합니다.

전설은 전설적입니다: 저는 제 아내 김나영에게 횃불을 넘깁니다.


안녕하세요,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 작가님!

서신을 읽으며 여러 생각들이 얽혀서 회신을 드리는데 며칠째 끙끙거렸어요.

아마도 서신을 통해 저에게 "사이코빌딩"이 작동하고 있는 걸까요?

서신과 마찬가지로 작가님의 작업들 역시 처음엔 자유롭고 즉흥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굉장히 세부적인 작동 원리가 치밀하게 조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동시에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붕괴 상태에 있다는 자기회귀적 구조를 의식하고 계시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배타적 논리합"이 궁극적으로는 "무(無)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셔서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특히 집중하고 싶은 것은 작가님께서 비물질적인 사유를 프랑켄슈타인화를 통해 물질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작가님께서는 "본질적으로/근본적으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그들을 그들답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기억이며, 이는 특성 영역부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해온, 마음에 저장된 삶의 경험과 행동의 캔버스 위에 각인된 것과 같은 기억과 습관"(p.27)이라고 말씀하시며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 "관습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궁극적인 것을 보여줄 수 없다"고도 하시면서 반복적인 행위로 몸에 익히는 것, 익숙해진 것으로부터 나오는 사유들, 또 다시 그것이 몸을 통해 이미지나 텍스트로 순환하고 환원되는 과정을 말씀하신 것 같아요.

이것은 "인간의 마음은 몸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하시며 일원론적 경향을 이야기하신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습니다. 생각이 "우리 몸의 전기화학적 과정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일치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사유는 결국 몸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고, 그래서 작가님의 작업이 단순한 개념 놀이가 아닌 구체적인 물질적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이겠죠.

이런 맥락에서 "자아-상태" 개념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작가님은 나를 교차하는 관계망들의 상황 속에서 나의 수많은 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자아-상태가 기능하려면 서술적 맥락을 동반한 자기-진술이 필요하다고도 하셨습니다.(p.6)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은 이 내러티브라는 것이 어떻게 해야 획득 가능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의 시간성은 "판타지"나 "야망"과 같은 방어 메커니즘이 "자아-상태"로 교묘히 위장해서, 어떤 구멍을 발견하거나 구멍을 만들어낼 여지를 주지 않는 것 같거든요. 현재의 미디어 환경과 사회적 조건들이 만들어내는 가속화된 시간성 속에서, 진정한 "오리피싱"이 가능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구멍을 내기 위해서는 먼저 구멍이 날 수 있는 견고한 표면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이미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상태에서는 구멍 자체가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닐까요?

작가님께서 스튜디오를 "위장된 아테네움"으로 만들어 "변하지 않는" 책들로 물리적으로 자신을 둘러싸는 행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디지털 정보의 바다에서, 물질적 고정성을 확보함으로써 진정한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겠죠. 또 "푸르스트 효과"처럼 냄새를 통해 편도체와 연결된 감정과 기억의 회로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부가/코-크롯 드로잉" 같은 작업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코라는 후각적 경험이 시각적 이미지로 번역되면서, 몸의 기억이 새로운 형태의 서술적 맥락을 획득하는 과정은 단순한 감각의 전이가 아니라, 자아-상태들이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소통하고 연결되는 "사이코빌딩"의 구체적 실례가 아닐까요?

결국 작가님의 작업에서 출판이 갖는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물질적 형태로 고정됨으로써, 가변적인 디지털 환경에서는 불가능한 종류의 반복과 참조가 가능해지는 것. 그리고 그 반복을 통해 새로운 습관과 기억이 몸에 각인되고, 다시 새로운 자아-상태를 생성해내는 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어떻게 진정한 "무화"로 향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질적 실천을 통해 비물질적 사유를 구현하면서도,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무의 경험이 가능한 것일까요? 혹은 바로 그 물질화 과정 자체가 무화로 향하는 길인 것일까요?

긴 편지가 되었는데, 혹시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가님의 사유와 실천이 만들어내는 복잡하고도 정교한 우주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Dear Nayoung Gim & Gregory Maass,

Hello, this is Chaewon, the coordinator. Thank you for your letter.
I've been wrestling with this response for days now, my thoughts tangling together as I tried to formulate a reply to your letter. Perhaps this is "psychobuilding" at work on me through your correspondence?

Like your letter, your artworks initially appear free-flowing and spontaneous, yet I sense an incredibly detailed operational logic meticulously organized within them. What fascinates me even more is how you remain conscious of the self-regressive structure—that systems are inherently unstable and in constant states of collapse—and how these "Exclusive OR" ultimately lead to "make nothingnessing (無)."

What I'm particularly drawn to is your process of materializing immaterial thought through Frankensteining. You emphasize the importance of memory, stating that "What essentially/fundamentally defines a person and makes them who they are is their memories which encompass everything from trait-domains to skills and habits that have been developed over time like an imprint, on a canvas of life experiences and behaviors stored in the mind. " (p.27). You also mention that "the ultimate cannot be shown without relying on the conventional," referring to what seems like a cycle where repetitive bodily practices create familiarity, from which thoughts emerge, only to circulate and return again through the body as images or text.

This appears to align with your monistic perspective when you say "the human mind is not separate from the body." From the viewpoint that thoughts "coincide with rather than derive from the electrochemical processes of our bodies," thinking can only be realized through the body. This explains why your work manifests not as mere conceptual play but as concrete material practice.

In this context, I find myself thinking about your concept of "self-states." You've mentioned discovering multiple facets of ourselves within the intersecting networks of relationships, and that self-states require self-statements accompanied by narrative context (p.6). What I'm curious about is how such narratives can be acquired.

Particularly in today's temporality, it seems that defense mechanisms like "fantasy" and "ambition" cunningly disguise themselves as "self-states," leaving no room to discover or create holes. Within the accelerated temporality created by current media environments and social conditions, what are the conditions that make genuine "orificing" possible? To make holes, there must first be a solid surface that can be punctured—but when everything is already fluid and mutable, doesn't the hole itself lose meaning?

Your act of creating a "camouflaged athenaeum" in your studio, physically surrounding yourself with "unchanging" books, can be understood in this context. In the endless sea of changing digital information, you secure material fixity to create genuine spaces for thought. The "Proust effect"—how scent activates emotional and memory circuits through the amygdala—can be understood alongside works like "Booga or Nose-crotte Drawing." The process where olfactory experience translates into visual imagery, allowing bodily memory to acquire new forms of narrative context, isn't mere sensory transfer but a concrete example of "psychobuilding" where different self-states communicate and connect through various media.

Ultimately, this seems to be where publishing finds its meaning in your practice. By fixing text and image in material form, you enable types of repetition and reference impossible in mutable digital environments. Through such repetition, new habits and memories are inscribed in the body, creating cyclical structures that generate new self-states.

Yet I remain curious about how genuine "making nothingness" can be achieved through this process. Is it possible to experience nothingness that transcends everything while implementing immaterial thought through material practice? Or is the materialization process itself the path toward nothingness?

This has become a lengthy letter, but I'd be grateful if you could point out any misunderstandings on my part. Simply glimpsing the complex and sophisticated universe created by your thinking and practice has been sufficiently stimulating and fascinating.

Thank you.

Chaewon Lee
2025.06.16


안녕하세요, 김나영, 그레고리마스 작가님,

일본에는 잘 도착하셨는지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반 진공상태에서 이 서신을 씁니다.

여러 시차때문에 이번 서신은 이채원 님이 언급했던 내용을 첨언하는 것이기도 하겠네요. 


1.

<설사>(2025)를 읽으면서, 파편적이고 여러 지식의 경계를 오가는 상태들을 머리속에서 다시 연결시켜봅니다. 이 책은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가 추구하는 다양한 상태, 관계망에 의해 연결된 제3의 상태(스테이트)에 대해 정의내리려는 열망을 엿보게 합니다.

그레고리 마스 작가님이 정의하는 상태에 아직 발견되지 못한 용어들 “나해예(TBEOL, 나중에 해명예정인)”, “IYI(지적이지만 바보 같은)”이 붙어있듯 아직 미발견된 것이지요.

지식과 지식을 사이에서 새롭게 해명되고 명명되어야하는 세계는 그야말로 발명되는 것이겠죠. 문득 도나 헤러웨이가 <겸손한 목격자>에서 그가 기술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지식과 설화, 사변을 오가는 활동이 떠올랐습니다. 과학연구에서 기입되지 않으나 실제 행위자로 활동하는 존재, 물질화된 기술과학을 설명하는 주체들로 여성인간, 앙코마우스 등을 기술과학의 비유로써 재등재시키고 기술과학을 재정의하는 접속점으로 활용하고 있는데요.

<설사>에서 학문과 지식의 경계를 넘어서 상상과 실천을 발생시키고 그것이 결국 물질과 사물로 순환되는 세계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독자적으로 형성중인 세계로 보이네요. 


2.

‘살아있는 인간’은 자기 성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무한한 피드백루프로 생성되는 결정들은 우리 인식의 의미를 형성하고 또 현재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작가님들의 작업 방법론을 떠올리는 비유입니다. “우리 몸이 더 이상 우리에게 필수적이지 않은 패턴의 일부” 이며, “많은 신체적 작업들이 외부로 위탁되었다”는 포스트휴먼적인 성찰과 함께 “피드백루프”가 단지 우리 신체 내부만의 메타볼리즘이 아니라 외부세계와의 결합과 관계에 의한 순환과 생성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말입니다. 작가님들이 다루는 매체인 “조각”, “사물”의 고정되지 않고 외부적인 것과 지속해서 관계맺고 피드백루프되며 의미가 생성되기도 소멸되기도 하는 그런 아이디어를 발견하게 합니다.


작업의 방법론을 지시하는 프랑켄슈타인화,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처음 알리는 개념) 사이코빌딩이: “관람자의 가정이나 기대를 넘어서는 것”, “우리는 관계를 창조한다. 관계는 서로 다른 것들(죽은 물체), 개념 또는 개인들이 연결, 접착, 못박힘, 겹침, 얽힘, 중첩되어 서로 영향을 미치는 수단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번영하는 것은 물체 사이의 공간이다”라고 말하듯이 한 개체를 벗어나 관계, 간 사이에서  번영하는 것이 이 방법론의 창조의 원천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원본의 것을 참조하지만 그 기원의 정체성은 외부와의 관계성에 의해 다른 의미로, 끊임없이 변형됩니다. 김나영 그레고리 마스 작업에서 사물이 다른 것과 결합하면 그 사물은 그 사물로서 있을수 없고 전혀 다른 맥락에 놓여 다른 의미의 개체가 되듯이요. 그래서 이것을 시시콜콜 해석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분명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분석, 해석하는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만들기가 될 수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그보다 관계성이 만들어지는 그 방법론에 주목하기로 해봅니다.  


그레고리 마스 작가님이 ‘무’, ‘공허’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여기서 연결시켜볼까 합니다. “빅터 프랑클이 …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내러티브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내러티브가 필요하다”라고 언급했듯, 인간은 늘 의미를 찾고 붙이려고 합니다. 의미가 없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여기고 사회에서 의미부여되지 않은 존재는 유령에 다름없죠. 그러므로 의미화는 생존의 방식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이를 자아 형성과 연결해 말하자면, “자아, 개인, 그리고 인격 이 세가지 개념은 허공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자아는 홀로 정의될 수 없습니다. “관계가 당신을 정의한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정의한다”라고 언급하셨듯, 의미체계에 들어가는 ‘나’는 관계의 방식들에 의해 무의미의 체계를 이어주는 창조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미화된 내러티브는 포착할 수 없는 자아를 정의하는 일종의 “판타지”일수 있으나, 이러한 연결방식들이 계속해서 변하는 자아를 설명하는 것이겠습니다. 

이를 작업의 방법론으로 연결해보면 “접착제, 못, 페이트, 연결, 겹침, 얽힘, 중첩”은 사물과 물체간의 연결을 통해 의미 체계로 들어오게 하고 제3의 새로운 사물로 도약하는 관계방식, 정의의 방식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면에서 프랑켄슈타인화, 사이코 빌딩은 태도이자 관점, 그 전부이기도 한 것 같군요! 이 방법론에 의해 계속해서 생성되는 사물들은 절대적인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에 맞게 자신의 모습을 변경할 수 도 있고, “오늘 나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와 같은 상태인 것이겠지요.

스스로를 다른 상태로 만들어 나가는 전시의 주제 “나에 반하여”와 사이코빌딩의 개념이 맞닿는 지점에서 조금 더 전개할 이야기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3.

신체의 구멍에서부터 헨리 무어 조각의 구멍, 블랙홀, 무의 개념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번 전시에서 수석(드림스톤)을 보여주기도 한 것과 연관있겠지요. 이 작업(작품명 미정)은 모양이 훌륭한 돌을 수집하는 전형적인 장식품 수집 취향과 “헨리무어적 드림스톤, 오리피싱 1”라는 하이브리드적인 결합 상태를 보여줍니다. 

조각에서 보이드를 내는 것은 조각에 공간성을 부여하고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작가님이 지적하셨듯, 보이드/구멍은 단단한 물체의 형태에 따라 생기거나 정의되는 단순한 원리는 아니지요. (그레고리 마스는 구멍 자체는 단단한 덩어리만큼 많은 형태-의미를 가질 수 있다라고 말한 헨리무어의 언급을 에둘러 탓하고 있습니다.) 보이드/구멍은 그 자체로, 포착할 수 없는 물체의 공백이기도 합니다. 사물에 낸 형태적인 구멍이 아니라 해명되지 않는 존재 자체의 구멍, 없는 상태에 가까운 것이기도요. 

신체의 구멍은 신체의 내부이면서 외부인 경계가 모호한 기관이지요. “사람들은 구멍을 실체적이고 셀 수 있는 물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그것들은 다른 물체 안에 무언가가 없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이 구멍의 상태를 “모든 것의 본질 없음”, “무아”, “자아죽음”, “불어 꺼진, 소멸된 자아(없는) 해방 상태”로 그 사유의 흐름을 이어나가고 있는데요. 김나영 그레고리 마스의 조각과 사물이 지속해서 만들어나갔던 관계성, 플랫폼으로서의 자기정의가 도달한 지점이 결국 “없는” 상태라는 것이 그동안의 모든 작업의 연결, 접속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여기서의 자기부정이 흥미롭기도 합니다. 

모든 물질들이 연결되고 서로 흐르게 될 시공간이자 관통되는 것으로서의 통로가 ‘구멍’일까요. 새로운 우주를 탄생시킬 수있다는 블랙홀처럼 구멍은 새로움을 발생시킬 창조적인 통로가 될까요. 이 상태는 그레고리마스 작가님이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하였듯 “나해예TBEOL”, 정의하기를 보류해야 겠습니다. 


작가님의 말을 반복하고 첨언하면서 여러 이야기로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서신을 보냅니다. 

 

2025.06.29.

노해나 드림. 



Dear Nayoung Gim & Gregory Maass,

I hope you arrived safely from Japan. I'm writing this letter in a semi-vacuum state on a plane to the United States. Due to all these time differences, this letter is also adding to what Chaewon Lee mentioned.


1.  

Reading Diarrhea (2025), I find myself reconnecting these fragmentary states that traverse the boundaries of various knowledge in my mind. This book offers a glimpse into the aspiration of Nayoung Gim & Gregory Maass to define the diverse states and the third state connected by networks of relationships that you’re pursuing. As Gregory Maass's definition of states includes terms not yet discovered - "TBEOL (To Be Explained One day Later)" and "IYI (Intellectually Yet Idiotic)" - these are indeed undiscovered territories. The world that must be newly explained and named between knowledge and knowledge is truly something to be invented. I was suddenly reminded of Donna Haraway's activities in Modest_Witness@Second_Millemium.FemailMan_Meets_OncoMouseTM where she moves between knowledge, narrative, and speculation to open new horizons in technoscience. She re-inscribes beings that are not recorded in scientific research but actually function as actors - women humans, OncoMouse, etc. - as metaphors for technoscience and uses them as contact points to redefine technoscience. In Diarrhea, I think about worlds where imagination and practice are generated beyond the boundaries of academia and knowledge, and these eventually circulate as materials and objects. It appears to be a world forming independently.


  1.  

The idea that 'living humans' have the capacity for self-reflection, and therefore the decisions generated by infinite feedback loops form the meaning of our perception and are influenced by current situations, is a metaphor that recalls your working methodology. Along with the post-human reflection that "our bodies are part of a pattern that is no longer essential to us" and "many physical tasks have been outsourced," this is about how "feedback loops" lead to circulation and generation through combinations and relationships with the external world, not just metabolism within our bodies. I discover the idea that the media you work with - "sculpture" and "objects" - are not fixed but continuously relate to external elements, feedback loop, and generate or dissolve meaning.

Frankensteining, which indicates the methodology of work, and psychobuilding (a concept first introduced in this exhibition): "exceeding the assumptions or expectations of viewers," "We create relationships. Relationships exist as means by which different things (dead objects), concepts, or individuals are connected, glued, nailed, overlapped, entangled, superimposed to influence each other. What we thrive on is the space between objects." As this suggests, moving beyond individual entities to thrive in relationships and in-between spaces seems to be the creative source of this methodology. This form references the original but its foundational identity is continuously transformed into different meanings through relationships with the external. Just as in Nayoung Gim and Gregory Maass's work, when an object combines with another, that object cannot remain as itself and becomes a completely different entity with different meaning in an entirely different context. So I wonder if it's meaningful to interpret this in detail. While creating new states and analyzing and interpreting them iconographically can certainly become interesting storytelling, in this exhibition, let's focus on the methodology by which relationships are created rather than that.

I'd like to connect what Gregory Maass said about 'nothingness' and 'void' here. As you mentioned, "Viktor Frankl... what we need ( in order to survive) is narrative. We need narratives that give us meaning." Humans always seek and try to attach meaning. Without meaning, one is as good as dead, and beings not given meaning in society are no different from ghosts. Therefore, I agree that signification is a way of survival.

Connecting this to self formation, "self, individual, and personality - these three concepts are conjured out of  thin air," and the self cannot be defined alone. As you mentioned, "relationships define you. Other people define you." The 'I' that enters the meaning system plays a creative role in connecting systems of meaninglessness through relational methods. The signified narratives created this way may be a kind of "fantasy" that defines the uncapturable self, but these connection methods would explain the continuously changing self.

Connecting this to work methodology, "glue, nails, paint, connection, overlap, entanglement, superimposition" might be relational methods and definitional methods that bring objects into meaning systems through connections between things and objects, enabling leaps into third, new objects. In that sense, Frankensteining and psychobuilding seem to be attitude, perspective, and everything all at once! Objects continuously generated by this methodology do not have one absolute fixed identity. Therefore, they can change their appearance to fit the times, in a state like "Today I will be a different person." I'm curious if there are more stories to develop at the point where the exhibition theme "Anti-Self: Undoing Oneself" and the concept of psychobuilding meet, as they create themselves into different states.

  1.  

Let's talk about the story that connects from holes in the body to holes in Henry Moore sculptures, black holes, and the concept of nothingness. This would be related to showing dream stones in this exhibition. This work (title undecided) shows a hybrid combined state of typical decorative collection taste for collecting beautifully shaped stones and "Henry Moorish Dreamstone, Orificing Ⅰ."

Creating voids in sculpture gives spatiality to the sculpture and serves to connect relationships with the surrounding environment. As you pointed out, void/holes are not simple principles that occur or are defined according to the form of solid objects. (Gregory Maass is indirectly criticizing Henry Moore's comment that holes themselves can have as much form-meaning as solid masses.) Void/holes are, in themselves, also blanks of uncapturable objects. Not formal holes made in things, but holes of being itself that cannot be explained, close to a state of non-existence.

Holes in the body are organs with ambiguous boundaries that are both internal and external to the body. "People tend to regard holes as substantial, countable objects, but in fact they are states of something not being there within other objects."

The state of this hole continues the flow of thought to "the essencelessness of all things," "selfless-state," "ego death," "blown out, extinguished self (absent) liberated state." The fact that the relationality and self-definition as platform that Nayoung Gim and Gregory Maass's sculptures and objects have continuously created ultimately reaches a state of "nothingness" seems to negate all the previous connections and linkages of work, while this self-negation is also intriguing.

Would 'holes' be passages as space-time where all materials connect and flow through each other? Like black holes that can give birth to new universes, could holes become creative passages that generate newness? This state, as Gregory Maass has not yet named it, "TBEOL," should be deferred from definition.

I send this final letter with the thought that by repeating and adding to your words, we can take root in various stories.

2025.06.29.
From Noh Haena



Would "holes" be passages as space-time where all materials connect and flow through each other? Like black holes that can give birth to new universes, could holes become creative passages that generate newness? We like details. They are often the difference between walking out of a situation and being carried out of it. Black holes do not give birth to new universes, but they seem to play a role in the creation of new universes. I refuse to elucidate on this subject vehemently, based on the fact that I have no knowledge, nor the mathematical savoir-faire and 30 years to spare, or anything interesting to say about it—just joking. Actually, as I mentioned before, black holes are not holes; they are called holes for lack of a better term. Nothing passes through them; even time does not pass through a black hole. A black hole is best described by its event horizon. Events are important; there are no events taking place beyond the event horizon. They don't give birth to anything much; they have a tiny bit of unmeasurably small radiation emanations, which he shyly called a bit of soft hair: Hawking’s radiation. Over time, they kind of evaporate. We also prefer the term timespace, as seemingly space is made of time. He pilfered this idea (emanation from black holes) from the works of a scientist called Jacob Bekenstein and declared it his own; Bekenstein is now all but forgotten. Newness would infer that you know everything, which is not really possible. It also sounds awfully romantic; normally, this refers to 18th-century German romanticism, which it is not. The New (with a capital N) is thankfully not limited to art; people don't like the New, as it brings changes and thus is not always welcome, hence a problem if you are highly or tremendously creative. And I don't mean the new McLaren W1; I’ve got to get one of those. Seemingly, we are not in desperate need of new universes; there are quite a few already, which are not yet/ever accessible to us, and if they are, they are not. The testing or verification of the multiverse theory is problematic, as it would take place in this universe, but that's only seemingly a problem, more the issue surrounding the definition of the word “test.” “A hole is something through which something that can also be a hole can pass” sounds not just almost obscenely pornographic. Pornography can very well be art; it's just not widely accepted due to mores and a general lack of production quality, which changes wildly over time. Jesus Franco's “Vampiros Lesbos,” which is not hard-core porn but more of an erotic real-estate thriller, is one of the more hypnotizing artworks of the 20th century I know. Fun fact: Hypnotism is a crude tool; you can't heal schizophrenia through hypnosis (nor any other mental disorder as far as I know, which is not very), but you can produce a more schizophrenic object. I have a question for you: “Shall I hypnotize you now, or would you like to be hypnotized later?” Transfer is not really a passage; you transfer one thing from one domain into another—knowledge, feelings, mentation—the 70s transfer of macramé to world peace (laughter!) did not work, nor did the transfer from language, talking (to yourself), drugs, CBT, TMS, tDCS, music, or physical exercise therapy to neuroplasticity, which works very well. Fun fact: it takes about nine months, on average, to profoundly rewire, neuroplasticize, or change your brain. Passages are not so interesting to us, but let's call it interstitia— the moonlit gate, or even the gateless gate, the space in between (where the moonlight shines through, where the missing gate is missing)—that’s what we thrive on.


"구멍"이란 모든 물질이 연결되고 서로 흐르는 시공간의 통로가 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우주를 탄생시킬 수 있는 블랙홀처럼, 구멍이 새로움을 생성하는 창조적 통로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디테일을 좋아합니다. 그것은[디테일은] 종종 상황에서 당당히 걸어 나가는 것과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것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블랙홀은 새로운 우주를 탄생시키는건 아니지만, 새로운 우주 창조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지식도 없고, 수학적 전문성도 없고, 30년의 시간도 없고, 이 주제에 대해 흥미로운 말을 할 것도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 주제에 대한 설명을 격렬히 거부합니다—농담입니다. 사실, 앞서 언급했듯이 블랙홀은 구멍이 아닙니다. 더 나은 용어가 없어서 구멍이라고 불릴 뿐입니다. 아무것도 그것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시간조차 블랙홀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블랙홀의 본질은 사건의 지평선으로 가장 잘 설명됩니다. 사건이야말로 핵심입니다.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서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블랙홀은 아무것도 탄생시키지 않습니다.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방사선 방출물이 조금 있을 뿐인데, 호킹은 이것을 수줍게 '부드러운 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른바 호킹 복사말이죠.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어느 정도 증발합니다. 우리는 또한 '시공간'이라는 용어를 선호합니다. 공간이 시간으로 만들어진 것 같거든요. 

호킹은 이 아이디어(블랙홀에서의 방출)를 야곱 베켄슈타인이라는 과학자의 작품에서 훔쳐와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베켄슈타인은 이제 거의 잊혀졌습니다.

새로움은 당신이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실제로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또한 지독하게 낭만적으로 들립니다. 보통 이것은 18세기 독일 낭만주의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새로움(대문자 N)은 다행히 예술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수반하므로 항상 환영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매우 또는 엄청나게 창의적이라면 문제가 됩니다. (물론 새로운 맥라렌 W1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 장만해야겠지만)

우리는 새로운 우주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미 꽤 많은 우주가 존재하지만, 우리는 아직/전혀 접근할 수 없고, 만약 접근할 수 있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중우주 이론의  검증은 문제적입니다. 이 우주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겉보기에만 문제이고, 진짜 이슈는 "검증"이라는 단어의 정의 자체입니다.

 "구멍은 역시 구멍이 될 수 있는 무언가가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은 거의 외설적으로 포르노그래피적으로 들릴 뿐만 아니라... 포르노그래피는 충분히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도덕적 관습과 일반적으로 부족한 제작 품질 때문에 널리 인정받지 못할 뿐이며, 이는 시대에 따라 크게 변합니다. 헤수스 프랑코의 〈뱀파이어 레즈비언〉은 하드코어 포르노가 아니라 에로틱 부동산 스릴러에 가깝지만, 내가 아는 20세기의 가장 최면적인 예술작품 중 하나입니다. 

재미있는 사실: 최면술은 조잡한 도구입니다. 최면술로 정신분열증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내가 아는 한,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정신 장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더 정신분열증적인 대상을 만들어낼 수는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지금 최면에 걸릴까, 아니면 나중에 걸릴까?" 

전이는 진정한 통로가 아닙니다.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무언가를 이동시키는 것입니다—지식, 감정, 정신 작용을요. 70년대 마크라메에서 세계 평화로의 전이(웃음!)는 실패했고, 언어, 자기 대화, 약물, CBT, TMS, tDCS, 음악, 또는 물리 치료에서 신경가소성으로의 전이도 마찬가지였는데, 신경가소성은 매우 잘 작동합니다.

재미있는 사실: 평균적으로 뇌를 근본적으로 재배선하고 신경가소성을 만들어내는 데는 평균 약 9개월이 걸립니다.

통로는 우리에게 그다지 흥미롭지 않지만, 그것을 간질공간—달빛 문, 또는 문 없는 문, 사이의 공간(달빛이 스며드는 곳, 사라진 문이 사라진 바로 그 곳)—이라고 부릅시다. 바로 그곳이 우리가 번영하는 곳입니다.



갱신을 촉구하는 오늘의 나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이하 김 & 마스)의 방법론은 “프랑켄슈타이닝”이라 할 수 있다. 
그레고리 마스는 프랑켄슈타이닝을 “다양한 곳에서 아이디어와 물건을 모으고, 그것을 분해한 뒤, 완전히 기이하고, 독특하고, 예상치 않았던 괴이한 결과물로 재조립하는 것” 이라 서술한다. 
이러한 방법론은 단순히 물건의 물리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연결을 구축함으로써 만들어지는데, 이와 같은 접합과 연결은 “관계를 만든다.”  
김 & 마스는 “관계는 서로 다른 사물들(죽은 물건들), 개념들, 혹은 개체들이 연결되고 / 접착되고 / 못질되고 / 겹치고 /얽히고 / 중첩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으로써 존재한다. 우리가 살고 숨 쉬는 공간은 사물들의 사이이다. 우리는 이 공간을 ‘사이 공간’이라고 부른다. 이 과정과 생산 방법은 ‘사이코빌딩’”이라 불린다고 말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김 & 마스의 작업은 관계 만들기를 통한 사건의 발생을 의도한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관계적 모델들을 생산하는 데 있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도구는 바로 기존의 작품들이나 형식 혹은 구조들 이다. 동시대 예술 작품은 “창조적 과정”의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항해의 장이자 포털인 동시에 행위의 발생인(發生因)이며, 포스트 프로덕션은 자기참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2006년 전시에서 천장에 설치되었던 〈성층권에서 온 싫증 난 좀비〉가 《안티-셀프》에서는 벽면 부조로 선보인 것처럼 작품의 의미는 현재의 작가 관점에 따라 재생성된다. 김 & 마스가 전시마다 신작을 다수 제작하는 작업 방식에서도 엿볼 수 있듯, 계속해서 갱신되는 작품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다르게 쓰이고 읽히는 상호텍스트성을 지닌다. 
그레고리 마스가 ‘자기 상태’를 “빛이 산란되는 프리즘”으로 표현하거나 “우리의 정체성은 자기 상태들의 집합”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기 상태, 관계, 자아, 그리고 성격은 시간 속에서 동일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작가가 자아를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계속해서 재조직되고 갱신되는 생산 방식처럼, 작가 주체 또한 ‘되기’의 연속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글; 노해나 ( '나를 향한 진술 — ‘안티-셀프’의 조각들' 에서 발췌, 전시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