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theneighbor.co.kr/neighbor/view.asp?no=10800&pType=D
PEOPLE
그레고리 마스와 김나영 작가, 이 듀오 아티스트가 보여주는 다양성과 자유로움, 그 비범한 작품 세계. 현실과 상상이 뒤얽히고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낯선 조화 속에서 기묘하고도 새로운 예술적 균형을 빚어낸다. 논리적이거나 아름답지 않은 놀라움을 받아들이면서, 그저 보이고 읽히는 것을 믿을 것. 이들이 전하는 위트와 유머에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24.12.06
더 네이버 2024년 12월호
성별도, 나라도, 문화적 배경도 다른 그들의 인생은 프랑스 파리에서 교차했다. 미술을 전공한 한국 여자, 철학과 미술 이론을 공부하던 독일 남자가 프랑스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 미술학교에서 만나 함께 학교를 다니며 부부의 연을 맺은 지 20여 년. 결혼 이후 조각, 회화, 설치 등의 미술 작업뿐 아니라 프로젝트형 갤러리 운영, 전시 기획, 출판 등 다양한 일을 공동으로 하게 되었다. 흔히 아티스트는 자아가 강해 같이 작업하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이 둘은 서로의 고집이나 색깔이 달라 발생하는 문제가 없을 만큼 생각과 취향이 잘 맞는다.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온 그들은 양평의 어느 한적한 골목 끝자락, 빨간 벽으로 이루어진 이층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작업하고 있다.
민들레 차와 초콜릿을 빈티지한 그릇에 내온 김나영과 1층 작업 공간에서 “작업실이 아니라 실험실”이라며 웃는 그레고리 마스의 공간은 고요한 은신처 같은 평온함과 수많은 객체가 집합한 현실 세계의 조각들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보물 창고 같았다. 1층 작업실과 계단 옆 벽면을 가득 채운 다양한 분야의 책들, 가지각색의 민속 인형, 조각품과 도자기, 앤티크한 의자와 자개장… 서로 상충할 것 같은 무수한 오브제들이 조화를 이룬 공간은 이들이 어떤 것을 관찰하고 수집하는지 드러내며 유쾌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11월 21일부터 2025년 2월 2일까지, 에르메스재단의 기획으로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선보이는 전시 <파라노이아 파라다이스>의 타이틀은 이들의 공간과 라이프스타일처럼 상반된 개념이 병존하는 작품 세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레고리 마스는 모순적인 동어반복이 반대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두 개념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종교가 천국, 극락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파라다이스’가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지만, 우리 둘 다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보다는 정신적(spiritual) 의미를 담고 있어요. 이 제목은 파라노이아와 파라다이스라는 다른 두 개념을 연결해 ‘시간은 돈이다’라는 은유(metaphor)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표현한 은유죠. 자본주의는 파라다이스이면서 디스토피아적 세계일 수도 있어요. 뒤섞이고 붕괴되면서 파라노이아(망상)가 나타납니다. 망상으로 인한 파라노이드(편집증)는 적대적이고 독단적이며 예측 불가한데요. 이런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의지를 억누를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에 대해 의심과 불안함을 품죠.”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설치한 작업은 60점에 달하는 신작이다. 작품 수만큼이나 시각적 과잉과 정보가 가지각색 오브제를 통해 표출된다. 그들은 하나의 물건이나 현상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든다기보다 특정한 시공간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모티프를 소재로 삼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다양한 소재를 어떤 식으로 작업하느냐이다. “일반적으로 기존의 견고한 것이 변화하는 걸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는 개개의 조각품을 변화시켜 하나의 체계성을 만들었어요. 둘 이상의 사물을 연결하고, 사물을 수집해 샘플링하고, 오버랩해서 디스플레이하는 그 모든 것이 일종의 체계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레고리 마스가 얘기한 체계성 안에서, 사물은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언뜻 위계 없이 무질서하면서도 정연하고, 하나로 규정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제한 없는 조합을 보여준다. 유리병 위에 올린 해부된 뇌와 틀니, 해부된 장기들이 X자 모양으로 군집을 이루는 콜라주, 담배꽁초를 입에 물고 타 들어가는 듯한 두상 형상의 도자기, 동양의 꽃 그림 족자에 붙인 파리채, 붓글씨로 쓴 영어 단어가 동양화 위에 놓인 병풍, 석고 피라미드 모형의 꼭대기에 비스듬히 꽂힌 스팸통… 상투적인 것들과 고급 예술,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산물, 과거와 현재, 이런 이질적인 것들이 뒤엉켜 독특한 세계를 드러낸다.
그레고리 마스와 김나영 작가는 자신들의 작업 방식을 ‘프랑켄슈타인화(Frankenstein ing)’라고 일컫는다. “묘지에서 훔친 시체 조각을 절단하고 조립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고자 했던 미친 의사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와 유사해요. 여기저기서 수집한 사물과 아이디어를 자르거나 떼어내고 붙이고 재조립해 새롭고 낯선 결과물을 만들어내니까요. 여러 가지 사물과 현상을 수집하고 활용하되 잘 만들어진 것과 잘못 만들어진 것 사이에 동등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작업을 발전시켜요.” 다다이즘이나 플럭서스 사조에서 영향을 받은 레디메이드와 변형이 가능한 핸드메이드 면모가 공존하지만, 그들은 레디메이드나 핸드메이드에 대한 향수가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일견 불편함과 난해함을 느끼게 하는 특이한 조합 방식이지만, 각 물체가 지닌 이질성을 개의치 않고 그것들의 원래 용도나 맥락, 전형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예술적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다.
1 ‘엑스 해부(X-Autopsy)’, 종이에 콜라주, 액자, 혼합매체, 104×90×10cm, 2024.
2 ‘계속 웃어라(Keep Smiling)’, 혼합매체, 109×30×30cm, 2024.
3 <파라노이아 파라다이스> 전시 전경.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장과 카페 마당 사이 중정에 ‘반야(般若) 키티(Kitty Enlightenment, 레진, 전등, 철, 바니시, 아크릴, 물감, 대리석, 170×150×258cm, 110×110×61cm, 2024)’가 설치되어 있다.
하나의 의미로 규정되지 않는 풍자와 유머
즉흥성을 띨 듯한 사물의 조합은 사실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발견한 탐색과 고민의 결과물이다. 그레고리 마스에 의하면 그 결과물이 지닌 의미는 어떤 판단과 결정의 결과로 형성된다. “의미는 모든 상황에 영향을 받으며 달라질 수 있어요. 일상의 사소한 행위나 타인을 해롭게 하는 행동조차도 유의미하게 여겨지죠. 그 의미 때문에 결정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요. 거기엔 무한한 루프(infinite loop)가 작동합니다. ‘의미’라는 개념은 ‘시간’이라는 개념과 같이 복잡하고 다면적이에요.” 그렇게 만들어지는 그들의 작업은 다양한 인물과 현상, 사물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피카소와 헨리 무어 같은 거장 아티스트와 미술 사조부터 신화, 자연과 과학적 지식, 혹은 추억 속 대중 스타나 이국의 민속 인형, 만화 캐릭터 등에서 비롯한 방대한 모티프가 등장한다. ‘파라다이스’라는 테마로 작업한 이번 전시는 극락의 사후 세계와 아미타불, 그리스 신화 속 풍요의 신 디오니소스, 로마 신화의 야누스 등 다양한 스토리를 읽어낼 수 있는 작업을 더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반야 키티(Kitty Enlightenment)’는 야누스를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공원 한구석에 버려진 대형 조형물을 가져와 작품으로 부활시켰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와 카페 마당 사이의 중정에 설치했는데, 야누스처럼 양쪽 공간에서 헬로키티의 다른 표정을 볼 수 있다. 원래 없던 눈과 입의 표정을 넣어 감정을 표현하는 키티로 회생시킨 것. “산리오 본사에선 헬로키티가 고양이가 아닌 어린 소녀라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야누스의 얼굴을 준 거죠. 야누스(Janus)가 1월을 뜻하는 January의 기원이 되는 단어이기도 하고, 문지기라는 의미의 Janitor도 여기서 파생한 단어죠. 1월이 주는 시작과 전환의 의미, 또 전시의 처음과 끝이기도, 통로이기도 한 위치에 있는 문지기라는 의미를 담았어요. ‘반야 키티’라는 작품명은 야누스와 같이 두 얼굴을 갖게 된 키티가 마침내 ‘깨달음(반야)’에 이르렀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고요. 후광처럼 비추는 조명 기구를 달아 열반에 든 모습을 표현했지만, 어두운 전시장을 환하게 비추면서 전시 전체를 지지한다는 의미도 내포했죠.”
그레고리 마스와 김나영 작가의 작품이 갖는 또 하나의 재미는 유희성이 다분한 작품 제목에 있다. 사물의 속성에 근거하면서도 보는 이로 하여금 가정과 기대를 뛰어넘게 하는 그들의 작품엔 한결같이 유머가 스며 있다. ‘쩔었어(I nailed it)’는 물감이나 붓이 아닌 ‘못 박기(nailing)’ 기법을 이용해 인체 변형으로 유명한 피카소의 드로잉을 2차원 회화에서 3차원 화면으로 재현한 작업이다.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귄터 위커(Gu¨nther Uecker)의 못 작업에서 차용해 작은 못들을 촘촘히 박은 후, 못을 제대로 박았다는 뜻으로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 쓰는 “I nailed it!(마침내 내가 해냈어!)”라는 탄성을 요즘 어린 세대가 많이 쓰는 속어를 가져와 제목으로 붙였다. 이전에도 여러 번 선보인 ‘코딱지 드로잉(Booger Drawing)’은 ‘마르셀 프루스트 효과’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주인공이 마들렌을 먹는 순간 그 맛과 향기를 느낀 시간의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코’가 냄새를 맡고 후각을 발동시켜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 모습을 그들만의 짓궂은 시선으로 담아낸 작업이다. 서예 시리즈인 ‘헤비멘탈(Heavy Mental)’은 버려진 병풍에 있던 한문 글씨를 떼어내고 붓글씨로 영문 단어 ‘헤비메탈’과 비슷한 발음인 ‘헤비멘탈’로 변형했다. “위트를 가미한 일종의 말장난인 거죠. 제목이 있으면 작품이 훨씬 재밌고 관객과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거든요. 둘이 하는 작업 과정도 균형감이 생기면서 더 풍부해져요. 이런 언어유희를 능숙하게 생각해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작업하는 조합의 방식을 드러내기 위해 즐겨 사용합니다. 삶엔 유머가 너무 중요하죠. 하지만 우린 웃기고 재밌는 코미디언이나 유머리스트(humorist)는 아니에요.”
4 ‘피라미드 유(Pyramid U)’, 유리, 석고, 혼합매체, 27×29×58cm, 2024.
5 ‘페퍼민트 패티의 정점(PPP(Peppermint Patty Pinnacle))’, 혼합매체, 144×70×70cm, 2021~2024.
예상치 못한 소재를 매치해 어떤 조합을 이뤄냄으로써 전형적이지 않은 새로운 의외성을 지닌 무언가를 탁월하게 구축해내지만, 그레고리 마스와 김나영 작가에게 한정적이고 가공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김나영 작가는 작품을 통해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말했다. 이들만의 유니크한 특색이지만 대중과 소통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작품이 주는 정보가 방대하고 여러 소재를 다루지만, 그 안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우리의 공통된 방식이자 태도라고 할 수 있죠. 유럽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유로센트릭한 부분도 있지만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오브제가 혼재해 있어요. 다양한 도시에서 살았던 경험뿐 아니라 인간과 역사, 지리학 등에도 관심이 많고요. 우리의 작품은 아는 만큼, 그리고 어떤 사고와 지식, 경험치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각자 다르게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조각품 하나하나의 어떤 의미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사람마다 바라보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다양하고 풍부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무리 비싼 다이아몬드를 갖고 있더라도 그게 당신을 표현해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관계를 맺는 것이죠. 서로 다른 사물들 사이에 연결되는 시간적, 공간적, 또 감정적 거리와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설치를 할 때도 그런 부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전체 주제 안에 있는 전시 자체가 하나의 작업이니까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낯설고 기이하게 느껴졌던 작품이 흥미롭게 읽혔다. 우리는 그들의 작품에서 수많은 물건과 현상과 현실을 보게 되고, 복잡하게 뒤얽힌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읽게 될 것이다. “어떤 관객은 작품을 보면서도 자신이 본 것을 믿지 않아요. 이것인지 저것인지, 맞는지 틀리는지, 두 가지 가운데 꼭 선택하지 않아도 됩니다. 둘 다 맞으니까요. 우리가 만든 작품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지 말고 그저 본 것을 믿고 즐기면서, 그렇게 만나기를 바랍니다.”
인물 KIM NEO 작품 KIM SANG TAE ©에르메스 재단 제공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