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 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
혹은 병의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의사가 된다.”[1]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이하 김&마스)’는 2004년부터 공동 작업을 하고 있는 현대미술가 그룹이다.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이 그룹은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협업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창작한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더 빨리,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점에 그 협업의 긍정성이 있다. 하지만 이 팀의 긍정성은 단지 양적인 차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김&마스의 커다란 긍정성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미술(작품)의
내적인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공생관계”로서 때로는 한 작가의 아이디어를 다른 작가가 발전시키기도 하고, 각자라면 불가능할 작업을 둘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쳐 성공시키는 협업의 메커니즘 자체가 이들 작품에 긍정적
지점을 만들어낸다. 한국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우선 이 두 작가는 한 사람의 감각과 사고능력으로 가능한 예술 창작의 범위를 벗어나 때로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때로는 흥미진진한 표현 방식으로 그들의 미술을 더 풍부하고, 더 다채롭게 해오고 있다.
나아가 이 글에서 차차 논하겠지만, 김&마스의 보다 큰 긍정성은 그들이 일률적인 체계와 방식의 강제성을 벗어나 자유롭고
유연하게 ‘어디든 적응하는 미술의 예외적 가치’를 제시한다는 데서 온다. 그와 동시에 한 명의 권위적인 예술가 주체가 독점적이고 배타적으로 행사하는 창조적 상상력과 조형능력을 넘어서는 ‘다자적이고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미술의 힘’을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있다는 데서 온다. 감상자가 김&마스의 작품들에서 복잡함 속의 유머를 경험하고 상투성 속의 기발함을 발견하며, 그 작품들을
경외 혹은 찬탄이 아니라 호기심과 흥미로 대한다면, 우리는 그 이유를 여기 두 긍정성에서 찾아야 한다.
부적합한, 독단적이지 않은, 재배치 가능한 미술
김&마스의 미술이 가진 특성이자 큰 힘은 ‘부적합함의 부적합함’이다. 나는 여기서 동어반복tautology을 사용했는데, 이는 한편으로 김&마스가 애용하고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착상의 방법론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2010년 오사카 호텔 아트페어에서 개인전을 한 김&마스는 전시장으로 쓰인 호텔 창 밖의 비즈니스 건물 풍경을 고려하여 방 창문 위에 시트지로 빌딩 이미지의 드로잉을 했다.
또 두부에 관한 작업은 판재와 앵글을 조립해서 알파벳으로 ‘TOFU’라고 쓰는 식의 동어반복, 하얀 가루로 만들어진 아스피린 알약에 대한 작품은 ‘ASPIRIN’이라는 글자를 새긴 동그란
석고조각을 만드는 식의 동어반복을 구사했다. 동어반복은 말의 내용이 뻔하다는
점에서 우선 단순하지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고, 같은 말의 반복 이외에 어떤 내용도 끼어들 수 없다는 점에서
적합/부적합, 타당/타당하지 않음의
경계조차 따질 수 없는 수사법이다. 김&마스가 이 문학 기술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동어반복의 바로 이 같은 장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김&마스가 세상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많은 사물들/생각들/장소들/시간들의 개별성 및 이질성을 작품의 내외적
완결성을 위해 훼손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각각의 존재와 차이의 상태를 고스란히 작품의 ‘현재시간’에 수렴시킨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들은 A와 B의 관계
맺음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적합하지 않은 부분(틈/간극/불연속)을 가상적 조화나 심미적 완결성을 위해 피상적으로 봉합해버리지 않는다.
그 면모는 이 작가들이 독특한 사고와 감수성을 기준으로 엄선하는 작업의 기초(재료,
콘셉트, 장소 등)에서부터 포착할 수 있는
점이다.
김&마스가
이제까지 해온 작품의 원천은 거의 모두 이전에 다른 곳에, 다른 목적과 용도로, 다른 형태로 존재했던 것들이다. 가령 그것은 1980년대
미국 아이돌 스타의 이름(David Hasselhoff)이기도 하고, 프랑스의 낙후된 지역에서 작가들이 컬렉션 한 낡았지만 가치가 있는 가구들(옷장,
거울, 서랍장 등등)이기도 하고,
중국 식당의 문화적 관습(국수를 먹은 후 화장실용 휴지로 입을 닦고 담배를 피워대는
행위 따위)이기도 하다. 사실 각 작품의 원천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는데,
그 원천이라는 것이 단순한 물건/물질적 소재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데 또 다른 핵심이
있다. 김&마스의 작품에 동원되는 소스는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작가들이 직접 구한 것들로, 키치/상투적인 물건에서부터 어떤 지역이나
어떤 시간대에 김&마스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름 없이 사라져 갔을 귀한 문화생산물까지 폭이 넓고 깊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비중으로 언어, 지식, 질서, 행동양태, 이데올로기, 취향 등 비가시적이고 개념적인 원천이 자리를 차지한다. 이렇게 물질적인 질료든 비물질적인 질료든,
양측이 모두 이질적이며 예외적이고 독특한 것들의 집산集散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김&마스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처럼 기성 사물을 고스란히 미술로 옮겨놓는
식의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혹은 티노 세갈Tino Sehgal처럼, 작가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어떤 창작도 하지 않는 가운데 오로지 개념들만 제시하는 지적 유희/비판의 미술을 하는 것 또한 아니다. 오히려 김&마스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맥락 속에 있었던 사물들을, 보기보다 꽤 강도 높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재구축/재형상화/재창조해낸다. 또 그들의 미술에서 비물질적이고 개념적인 차원은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작품의 구상 단계에서
기존의 인식이나 관습에 대한 위반/변형/또 다른 제안의 촉매제로 삽입된다.
그렇게 해서 감상자들이 실제 시간과 공간에서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작품을 통해 새롭고 낯선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대체로 김&마스의 작품에 쓰이는 질료 및 개념은 첫째, 전형적인 의미의 미술에는 ‘부적합한 것들’이다. 둘째, 그 사물이나 사고내용이 이전에 적합하다고 가정됐던 콘텍스트로부터 ‘버려진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그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사건들―콘텍스트의 견고함과 안정성과는
반대되는 우연성과 가변성의 의미에서 사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새로운 환경을 찾아 유랑할 수 있는 ‘부유물들’이자 ‘정통성의 독단에서 자유로운
것들’이다. 김&마스의 미술이 무엇보다 높이 평가 받아야 할 부분은 바로 여기,
즉 부적합하고, 떠돌이에 불과하며, 근본을
상실한 것들을 통해 ‘부적합하고, 예술로서의 독단을
내세우지 않으며, 어떤 형태로든 재배치 가능한 미술작품’을 구현한다는 데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부적합하고, 독단적이지 않으며, 재배치 가능한 미술이 그들의 것이다. 김&마스는 부적합한 것들을 왜곡시켜 미술에 적합한 것을 만들고, 권위 없는 것을 이용해 미술의 권위를 다시 확인하며, 현실의 파편들을 억지스럽게 짜깁기해놓고도
그럴듯하게 미술의 오리지낼러티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김&마스가 2008년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기단프로젝트” 사업에 당선돼 구(舊) 서울역사 앞에 설치한 기념물 <뒷모습이 예쁜
그녀Mona Lisa Overdrive>를 보자. 나무,
철, 스펀지, 플라스틱 재질의 면과 골조로
구축된 이 작품은 얼핏 보면 3미터 50센티의 거대한 무정형 괴물덩어리로
보인다. 마치 폐차장의 압축기에 들어가 뭉뚱그려진 여러 대의 자동차 형상에 가까운 그 작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도시 조형물을 두고 기대하는 전형적 아름다움이나, 작품이 설치되는 장소 및 공간사용자의 욕구에 아첨하는 태도가
없다. 그러기에는 <뒷모습이 예쁜 그녀>는 생경한 형태와 색채를 과시한다. 하지만 작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서울의 얼굴, 모습을 표현하는
다른 시점”을 제시하고자 했고, “생산적인 도시의 생리”를 고려했다. 그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기념물은 현기증 날만큼 빠른 속도로 변해왔으며 글로벌 혼성모방pastiche
도시인 서울의 진짜 모습이자 숨길 수 없는 생리를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한 작품이다. 그 정확한 시각화를 위해서 김&마스는 관습화된 조화의 예술, 무색무취의 도시조형물 패턴에 영합하지 않았다. 반대로 <뒷모습이 예쁜 그녀>는 ‘부조화’라는 미적 조화의 ‘뒷모습(裏面)’을 선택함으로써 서울ㆍ서울역이라는 ‘장소의 특정성site-specificity’을 긍정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뒷모습이 예쁜 그녀>는 작가들이 서울역 전시 이후 경기도미술관에 기증해서 그곳 마당에
설치돼 있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구 서울역에서 경기도미술관으로 이전했다면,
이 작품의 장소 특정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미술사의
유명한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가 1981년 뉴욕 맨해튼의 페더랄 플라자에 설치한
<기울어진 호Tilted Arc>는 작품이 그 공간에 들어선 직후부터
연방정부 관리들과 시민들의 비판으로 철거 요구에 시달렸다. 그리고 결국 8년여의 오랜 공방 끝에 법원의 철거 결정에 따라 1989년 3월 페더랄 플라자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120피트 길이의 녹이 스는 철판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현대미술사에서, 특히 공공미술의 비평 담론
안에서 전설이 되었다. 미술작품의 ‘장소 특정성’에 대한 논쟁에서 빠지지 않는 예로 세라의 <기울어진 호>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세라는 연방 정부에 의해 철거될 위기에 직면한 그 작품이 “페더랄 플라자라는 특정 장소를 위해 위촉되고 디자인된” 장소 특정적 조각임을 주장했다. 특히 작가는 “장소 특정적 조각”이란 “장소에 적합하다거나 재배치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작품이 장소의
물리적 성격과 사용자의 행위를 변화시키는 차원에 방점을 찍었다. 또한 그런 논거로 세라는 <기울어진 호>를
결코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없다고 버텼으며, 결국 작품은 다른 환경과 새로운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현대미술계, 특히 공공미술 분야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단어가 된 ‘장소 특정성’이라는 것이 세라의 입장처럼 ‘기존 장소와의 적합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 하나다. 가령 어떤 경우는 미술작품이 기존 장소의 문제를 드러내고,
작가가 기대하는 장소의 성격 변경과 공간 사용자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적합한 장소 특정성’을 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울어진 호>가 결국 작가/작품의 권위적 태도와 과도한 원본성의 고수로 소멸해버린 것과는 달리,
어떤 작품들은 어디든 적응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생각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김&마스의 <뒷모습이 예쁜 그녀>을 주목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장소 특정성 내에 ‘장소 부적합성’도 포함될 수 있으며, 동시에 특정 문맥에만 봉사하지 않는 유연하고 생명력 강한 미술의 긍정적 가치를 따질 수 있는 한 사례인 것이다.
기호의 방출에 반응하며
그렇다면 김&마스는 어떻게 이질적이고 서로 부적합한 것들로부터 그 이질성과 부적합함을 긍정하는 미술을 할 수 있었는가?
그 답을 이 글의 모토로 인용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어떤 물질/대상/존재를 각자가 고유한 기호를 방출하는 것으로 여겨야 하며, 그 방출된 기호를 시간 속에서 해독하고
해석하는 일이 배움의 과정이라 했다. 이를테면 추상적 지식이나 이론으로 물질/대상/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유한 것들을
경험하고, 그것들로부터 발산되는 기호를 지각하고, 읽고,
풀이하는 일이야말로 올바르고 타당하다는 말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 기호 학습의 과정으로부터
자신의 통일성과 놀라운 다원성을 끄집어낸”[2] 문학작품이다. 김&마스의 미술
또한 이러한 논리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각 작품은 사전의 정의처럼 일률적으로 추상화되고 관념화된
사물/개념의 반복이 아니라, 그 사물/개념이 애초 갖고 있었거나 우리의 삶 속에서 재주조되고 재형성된바(존재/가치/형상 등)에 대한 작가적 경험이자 반응이기 때문이다.
앞서 두부는 ‘TOFU’로 동어반복 되는 것 같지만, 사실 작품으로서 후자는 네모난 두부가 가진 직선과 부드러움, 단순함과 친숙함의 기호를 표현하고
있다.
김&마스의
작품 거의 모두가 사물들/생각들/장소들/시간들이 방출하는 기호에 대한 예술적 응답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술적인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조형예술이 표방한 가치들, 즉 영원함, 조화로움, 미, 원본성, 완결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오히려 김&마스의 작품들은 즉흥성과 우발성을 용인하고, 기존의 것들에서 부조화와 낯섦을 인식하며, 저자의 원본성과 작품의 궁극적 완성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방법적으로 이들은 과거에 누군가 다른 용도로 썼던 물건들을 현재의 설치작품으로 재구성하고,
기존 미술사의 대가 및 명작들을 텍스트 삼아 새로운 풍경을 조성한다. 전자의 예로
2009년 프랑스의 한 농촌에서 작업한 를
들 수 있는데 , “해가 안 나기로 유명한” 그 곳에서 김&마스는 지역민들이 쓰고 버린 가구 중 거울만 떼어내 일종의 '집광기(集光器)’로서 작품을 만들어 지역공동체 야채밭 안에 설치했다. 그리고 후자의 예로는 제프 쿤스Jeff Koons의
(1985)에 대한 "아시아적인 대답 ”으로 사각형 유리 진열장 위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배추를 결합한 가 있다. 또는 폴 세잔느가
를 그렸던 엑상프로방스의 생 빅토와르 산 밑에,
낡은 담요와 봉제인형들을 쌓고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세잔느의 풍경화를 3차원으로 재현한
을 들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글로 써 놓으면 무언가 잡다하고 어딘지 조악하게 여겨지는 김&마스의 작품들이 실제 그 작품이 존재하는
상황 및 환경 속에서 꽤 독특한 구성력과 존재감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주변 조건과는 맞지 않아 산만하게 흩어질
것 같지만, 정작 이들의 작품은 여러 가지 색채와 질감을 가진 사물들을 통해 가능한 통일성과 다원성의 면모를
제시한다. 제도적으로 안정된 질서를 따르지도 않고, 미적 규범의 원리를
사실상 전면적으로 의심하며 나아가는 김&마스의 작업에서, 그
작업의 속성과 메커니즘으로만 가능한 감각 질서와 형상들이 빚어지는 것이다. 그 미술에 이름이 있어야 한다면,
나는 '비/제도적 세팅'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싶다. 내적으로 닫혀있고 완결된 체제를 따르는 작품(art
work, 비록 이제까지 우리가 관례적으로 그 명칭을 김&마스의 경우에도
썼지만)이 아니라, 언제 어느 때고 상황과 조건에 따라 유연하고 실험적으로
구성ㆍ연출ㆍ표현되는 과정들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아르헨티나의 문학가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은 예술작품이란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처음을
놓치고, 예술가의 입장에서는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와 같다.”고 썼다. 나는 그의 말이 모든 창작예술작품에 해당되지만, 특히 현대미술과 김&마스의 미술에 매우 적확하게 들어맞는 주장이라 생각한다. 감상자는 제아무리 작가와 근접한 관계에
있거나 작품이 만들어진 과정의 사실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현대미술작품이 탄생하는 다층적이며 다질(多質)적인 차원을 들여다보거나 직접 경험할 수 없다. 그와 평행선상에서 작가는 제아무리 자신에게서 산출된 작품이라 해도, 그 작품이 구체적인 개인으로서
감상자에게 수용/향유/조응되는 차원을 통제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감상자에게 작품이란 그 기원 혹은 전사fore-history를 헤아리기 힘든 무엇이라면,
작가에게 작품은 그 종결 혹은 후사after-life를 예측하려 해도 자신에게는
그 권한이 없는 무엇인 것이다. 어쩌면 그 과정(작품의 삶)
전체가 블랙박스처럼 입력과 출력은 있되, 내부를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다.
김&마스는 바로 이러한 맥락을 긍정하고, 그 맥락이 작용하는 미술의 구조로부터 지속적이고 유연하게 이슈를 뽑아내고, 질료들을 매만져
세상을 세팅한다. 세팅된 시간과 공간은 일시적이고 유한하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들 작품에 ‘조명illumination’이라는 행운이
깃드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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