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cing to the Rhyme: Review미술에서 시적인 것
굳이 “시는 그림과도 같다”고 말한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ce)의 《시학(Ars Poetica)》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문인들이 시각적 보기와 표현법을 언어에 적용하려 고심해 온 예술의 역사를 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술가들이 시각이미지 속에 서술적 내용과 문학적 상상력을 함축하려 부단히 시각 체계를 변화시켜 온 역사를 안다. 그리고 앞서 리히터나 문성식의 경우에서 보듯이, 현대미술계에서 여전히 다수의 작가들은 가시적 이미지와 그 효과에만 매달리지 않고, 때로는 시를 짓고, 때로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물론 미술은 시각이미지를 주요 속성으로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이미지는 의미, 개념, 내러티브와 동행하거나 상호작용한다. 특히 고도로 장르의 복합화와 시각언어의 지성화라는 경로에 있는 현대미술 경향 속에서는 ‘이미지’와 ‘시적인 것’이 공존하거나 상호 교환되는 차원이 실재하고, 이미지의 언어적 차원 또는 텍스트적 차원이 과거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중요시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금호미술관 외부 기획전 <운율에 맞춰 춤을 추다(Dancing to the Rhyme)>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획자 오선영에 따르면, 전시는 “작품에 내, 외재되어 있는 이미지와 언어,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운율과 그 운율을 통해 만들어지는 리듬에 대한 이야기”란다. 그러니까 여느 그룹전과 별 다르지 않게 국내외 작가 14명(팀)이 각자의 의도와 맥락에 따라 제작한 작품들이 하나의 집합을 이루고 있는 이 전시에서, 차별화된 구성의 원리이자 주제는 미술작품의 ‘운율’ 또는 ‘시적인 차원’이다. 이는 전시기획 분야에서 특별할 것이 없거나, 반대로 매우 어려운 문제일 수 있다. 즉 한편으로 모든 전시기획이 이질적이고 기원이 상이한 작품들을 마치 텍스트를 쓰듯이 씨실과 날실로 직조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동시대 미술이 개념화 비물질화하고 한시적이거나 우연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조형과 물질적 존재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각 작품이 지닌 운율/시적 속성을 어떤 전시가 성공적으로 드러내기는 힘들다.
<운율에 맞춰 춤을 추다>전 또한 이렇게 예상 가능한 양가적 가능성을 깨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몇몇 작품들이 탁월할 만큼 시각예술에서만 가능한 운율의 질서 혹은 가시적인 것들의 시학을 선취한 덕분에, 전시는 애초 기획측이 설정한 바를 비교적 만족스럽게 실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감상자에게 책의 공간과 문자 형상들과는 다른 성격의 시적 경험을 제공했을 것임은 물론이다. 예를 들어 1층 전시장 흰 벽에 프린트된 히맨 청의는 베를린이나 린츠 같은 도시에서의 작가 행보를 몇 줄로 기록한 문구가 곧 작품이다. 그런데 그 짧고 건조한 문장들은 대지미술가 리처드 롱의 구도자적인 취향과도 다르고, 19세기 서정시인 보들레르의 도시 산보와도 다른, 지금 우리시대 걷기의 감수성을 압축하고 있다. 이를테면 스마트폰을 들고 글로벌 도시의 다운타운을 헤매며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단문 메시지를 전송하는 식의 감수성. 또 김나영+그레고리 마스의 경우는, 일견 극히 평범하거나 심지어 조악한 생활 속 물건들을 생경한 방식으로 조합하고, 공간 속에 비선형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상투적 기능 및 위치를 벗어난 사물의 감촉을 감상자가 지각하도록 이끈다. 가령 2층 전시장 구석의 창문 옆에 놓인 두 개의 장식용 유리관이 문자 그대로 투명한 빛의 시정(詩情)이라면, 트라이폴더로 연결된 ‘순창 골드퐁’ 플라스틱 통과 샹들리에는 로트레아몽(Lautréamont)의 “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 만큼이나 초현실주의적인 시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전시에서 가장 멋지게 ‘시각이미지의 시학’을 제시한 경우는 최승훈+박선민의 작품들일 것이다. 그들이 전시장의 허공에 배열한 알전구들은 노랗게 빛을 발하면서, 청각장애인들의 점자 텍스트를 대신할 뿐만 아니라 활자들의 내부에서 미처 발화되지 못한 말의 온도를 느끼게 한다. 또 이 작가들의 영상작품에서, 별모양으로 오려진 종이가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 혹은 먹물처럼 짙은 어둠으로부터 정체모를 빛 조각이 떠올랐다 흐려지기를 반복하는 순간은 무수한 언어들이 포착하려 했으나 항상 그 뒤에 단어만 남았던 존재를 직관적으로 경험케 한다. 명명하자면 ‘볼 수 있는 것들의 시학’이라할만한 미술의 오래된 수사법은, 현재 이렇게 허무하지만 세련된 취향의 대상으로 이어지며 동시에 사라져간다.
글: 강수미
Art in Culture 아트인컬쳐
April 2011
Seoul
굳이 “시는 그림과도 같다”고 말한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ce)의 《시학(Ars Poetica)》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문인들이 시각적 보기와 표현법을 언어에 적용하려 고심해 온 예술의 역사를 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술가들이 시각이미지 속에 서술적 내용과 문학적 상상력을 함축하려 부단히 시각 체계를 변화시켜 온 역사를 안다. 그리고 앞서 리히터나 문성식의 경우에서 보듯이, 현대미술계에서 여전히 다수의 작가들은 가시적 이미지와 그 효과에만 매달리지 않고, 때로는 시를 짓고, 때로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물론 미술은 시각이미지를 주요 속성으로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이미지는 의미, 개념, 내러티브와 동행하거나 상호작용한다. 특히 고도로 장르의 복합화와 시각언어의 지성화라는 경로에 있는 현대미술 경향 속에서는 ‘이미지’와 ‘시적인 것’이 공존하거나 상호 교환되는 차원이 실재하고, 이미지의 언어적 차원 또는 텍스트적 차원이 과거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중요시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금호미술관 외부 기획전 <운율에 맞춰 춤을 추다(Dancing to the Rhyme)>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획자 오선영에 따르면, 전시는 “작품에 내, 외재되어 있는 이미지와 언어,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운율과 그 운율을 통해 만들어지는 리듬에 대한 이야기”란다. 그러니까 여느 그룹전과 별 다르지 않게 국내외 작가 14명(팀)이 각자의 의도와 맥락에 따라 제작한 작품들이 하나의 집합을 이루고 있는 이 전시에서, 차별화된 구성의 원리이자 주제는 미술작품의 ‘운율’ 또는 ‘시적인 차원’이다. 이는 전시기획 분야에서 특별할 것이 없거나, 반대로 매우 어려운 문제일 수 있다. 즉 한편으로 모든 전시기획이 이질적이고 기원이 상이한 작품들을 마치 텍스트를 쓰듯이 씨실과 날실로 직조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동시대 미술이 개념화 비물질화하고 한시적이거나 우연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조형과 물질적 존재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각 작품이 지닌 운율/시적 속성을 어떤 전시가 성공적으로 드러내기는 힘들다.
<운율에 맞춰 춤을 추다>전 또한 이렇게 예상 가능한 양가적 가능성을 깨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몇몇 작품들이 탁월할 만큼 시각예술에서만 가능한 운율의 질서 혹은 가시적인 것들의 시학을 선취한 덕분에, 전시는 애초 기획측이 설정한 바를 비교적 만족스럽게 실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감상자에게 책의 공간과 문자 형상들과는 다른 성격의 시적 경험을 제공했을 것임은 물론이다. 예를 들어 1층 전시장 흰 벽에 프린트된 히맨 청의
그러나 무엇보다 이 전시에서 가장 멋지게 ‘시각이미지의 시학’을 제시한 경우는 최승훈+박선민의 작품들일 것이다. 그들이 전시장의 허공에 배열한 알전구들은 노랗게 빛을 발하면서, 청각장애인들의 점자 텍스트를 대신할 뿐만 아니라 활자들의 내부에서 미처 발화되지 못한 말의 온도를 느끼게 한다. 또 이 작가들의 영상작품에서, 별모양으로 오려진 종이가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 혹은 먹물처럼 짙은 어둠으로부터 정체모를 빛 조각이 떠올랐다 흐려지기를 반복하는 순간은 무수한 언어들이 포착하려 했으나 항상 그 뒤에 단어만 남았던 존재를 직관적으로 경험케 한다. 명명하자면 ‘볼 수 있는 것들의 시학’이라할만한 미술의 오래된 수사법은, 현재 이렇게 허무하지만 세련된 취향의 대상으로 이어지며 동시에 사라져간다.
글: 강수미
Art in Culture 아트인컬쳐
April 2011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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