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ARTIFICE 인공의 지평, 2005

김나영_CAFE_알루미늄, 플라스틱, 가변설치_2002

Group Show: BEYOND ARTIFICE 
 인공의 지평

치우금속공예관 The Chiwoo Craft Museum 개관기념展

2005_0512 ▶ 2005_0610


참여작가_김나영_김송이_김정석_김태완_남지_류수현_박성현_박충흠_박현주

심현석_윤덕노_이동춘_조새미_이윰_최우람_원조참방짜수저공방(김영락)

형제대장간(유상준, 유상남)_Andy Thomson


세미나_2005_0528_토요일_2~5 pm

한국소비자보호원 3 세미나실

주제_인공의 지평과 가능성

발제_이영철(계원예대 교수), 이인범(치우금속공예관장), 김홍남(국립민속박물관장)


예술과 담론 

우리 역사 속에서 예술을 둘러싸고 요즘처럼 담론이 무성한 때도 없었다. 이른바 민주적 평등주의를 내세운 일련의 정치기획들 속에서, 혹은 인문학의 위기론이 널리 퍼진 가운데 철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분과 학문들이 스스로의 활로를 개척하려는 시도들 안에서 예술에 관한 언급들이 넘쳐흐른다. 예술이 정치권력이나 거대 자본의 보호 속에 안전을 구가하는가 하면, 미술관 같은 여러 장소에서 예배 대상이 되고, 나날의 신문, 잡지, 방송 들을 장식하는 나위 없는 재료가 되었다. 오늘날 예술가는 완전한 자유를 성취한 같다. 이제 우리는 예술을 구속하는 어떠한 정의(definition) 갖고 있지 않다. 일상의 도구들도, 상품상자나 입다가 버린 옷들, 쓰레기더미마저도 예술가가 작품이라 하면 작품으로 둔갑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들은 전에 없는 해방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이렇게 예술에서 성취된 자유와 개방성은 아더 단토의 말대로, 기존의 '예술의 종말' 징후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 전개와 무성한 담론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너나 없이 예술을 말하지만, 철학자들이나 이론가들이 일컫는 미술의 철학화라는 전제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미술사가들이 벗어나기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예술의 역사화라는 과제는 또한 어떠한 것인가? 정치가들이나 자본가들이 되뇌는 예술 예찬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닌 언사들일까? 외부로부터 쏟아지는 그러한 관심들에 고무되기에 앞서, 발언들의 진의가 어떠한 것인지는 꼼꼼히 따져 일이다. 예술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다를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정작 예술의 어떠한 국면을 향해있는지는 주시해 봐야 한다. 혹시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분야의 장르적 효용성을 입증하기 위해 예술이 얘깃거리가 만하다는 것은 아닌가 여겨지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성한 담론들에서 정작 예술이 자체로 이야기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삽화로 취급되거나 희화화되는 경우가 허다하게 목격된다. 그렇다면 정작 우리를 예술 내부로 안내하는 이야기를 소란스러운 저간의 소음과 먼지들 속에 뒤섞는 일을 똑같이 동일시해서는 되는 아닌가?


'예술' 위기 속의 '인공의 지평' 

어떻든, 작금에 만연해 있는 자유나 개방성에 도취되어 예술에 깃든 위기적 상황을 무심코 지나칠 일은 아니다. 자유와 개방성을 노래하거나 혹은 예술의 종말론적 상황을 지적하는 일이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같이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더더군다나 최근 그러한 해방감이 오히려 예술의 내부를 적지 않게 황폐화시켰다는 사실에 주목해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을 정치 사회적 종속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주의적 맥락이나 혹은 섣부른 종말론과 유토피즘에 가두는 역시 온당치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최근 자주 거론되는 예술의 위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예술 자체의 내재적 관점에서 지금 시점에서 무엇보다도 긴요해 보이는 것은 미술의 존립 기반이랄 있는 기존의 사물관의 해체현상이다. 가깝게는 강렬한 이미지들이나 커뮤니케이션의 홍수 속에서, 크게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주조해내는 끝을 없는 욕망이나 대량생산으로 넘치는 산더미 같은 물건들 속에서, 종래의 사물들의 존재론적 위상은 적지 않게 요동치고 있다. 더더군다나 시대에 전면화 디지털 문명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사물에 대한 종래의 윤리적·인식론적 태도와 크게 어긋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어도 우리가 세계 속에서 무엇을 만든다는 일은 무엇이며 우리 주변의 온갖 인공물들, 혹은 사물성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정작 어떠한지를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치우금속공예관의 개관기념전 1 『인공의 지평』전이 위치하고자 하는 자리는 바로 '여기'이다. 취지는 예술작품과 거점인 공예,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들 모두의 매트릭스라 인공물 자체가 내뿜는 에너지를 선입견 없이 바라보자는 데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오늘날 사물들 혹은 예술적 오브제를 둘러싼 혼돈되고 착잡한 우리의 이해방식을 뒤흔드는 일이고 인공의 지평 안에 잠복된 새로운 비전을 일깨우는 것이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집착하는 공예, 혹은 예술이라는 좁은 울타리는 의미를 잃는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오히려 그것을 낳은 보다 근원적이고 드넓은 모태, 나아가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태초의 접점을 향해 간다. 그런 점에서 『인공의 지평』전이 궁극적으로 기도하고자 하는 것은 '공예' '예술' 집짓기이기 이전에 '공예' 이전으로의 귀환이자, '예술'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귀향활동이며, 인간의 행위가 자연과 만나는 원초적 형상을 찾아나서는 탐사여행이다. 말할 여지도 없이, '예술' 혹은 '예술작품' 무엇이기 이전에 인간이 자연, 세계 속에 드리워 놓는 다양한 흔적들, 그러한 인공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꾸려 예술이란 영토는 광활하기 그지없는 무릇 인공물의 세계와 그리고 터전인 자연을 타자화해 가면서, 특수하고 상이한 가치를 추구하며 구축해 그래서 억지 세계라는 사실을 부인할 없다. 때로는 기존의 것들과 유사성을 모색해야 도달할 있는 곳이 예술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그들과 차별성을 추구해야 비로소 예술일 있는 기구하고 역설적인 운명을 떠안으며 펼쳐 극단적인 인위성의 세계이다.

반면, '인공의 지평'에서는 도구 생산수단과 그에 의한 생산물, 예술과 비예술간의 경계, 상품과 작품 우리가 구별하는 숱한 사물의 이원적 경계는 들어설 틈이 없다. 과거와 현재, 계층과 계층 간의 분열 오늘날의 혼잡 사태들은 밑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줄기로 모일 것이다. 예술은 인과의 사슬을 끊고 그동안 자신이 지나온 기나긴 도정에서 쌓인 피로를 잠시나마 털어내고 편안히 쉬게 것이다. ■ 치우금속공예관


www.chiwoocraftmuseum.org

https://neolook.com/archives/2005051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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