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keful dream 깨어 있는 꿈: 사물의 정치학


전시 공간에 놓인 사물 하나를 바라본다. 그것은 군청색의 볼링공이다. 손가락이 넣는 볼링공 구멍에는 귀여운 프랑스 손가락인형 기뇰(guignol)이 끼워져 있다. 기뇰은 목에 앙증맞은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이 볼링공은 굴러 내릴 듯한 비스듬한 면에 놓여 있기도 하고, 평균대와 유사한 구조물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기도 하다. 그런데 볼링공은 왜 여기 있는가? 이건 ‘깨어 있는 꿈’이다. 마치 꿈에서 본 듯한 초현실적 형상이 눈앞에 놓여 있다. 앙증맞은 목도리를 한 귀여운 인형의 얼굴. 이 얼굴과 결합된 볼링공. 그 공은 위태롭다. 이 볼링공에서 어떤 의미를 읽을 수 있을까? 볼링공의 묵직함? 인형의 귀여움? 작은 목도리의 앙증맞음? 평균대의 아슬아슬함? 이것들의 조합이 가져온 불편함? 특정한 어떤 의미가 읽히지 않는다. 그저 이 볼링공이 가진 어떤 느낌이 전달될 뿐이다. 꿈을 꾸는 듯한 느낌. 어떤 것으로 규정하기 힘든 느낌. ‘깨어 있는 꿈’을 꾸는 느낌.

눈을 뜨고 꾸는 꿈
오늘날의 미술 상황을 ‘역사-이후(post-historical)’의 예술, 즉 ‘예술의 종말 이후(After the End of Art)’의 예술(아서 단토, Arthur Danto)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정의했던 아서 단토가 자신의 ‘예술’ 개념을 데카르트와 플라톤에 기초하여 ‘깨어 있는 꿈(wakeful dream)’으로 새롭게 정의한 것은 여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정의는 김나영[Nayoungim]과 그레고리 마스[Gregory Maass](이하 ‘김&마스[N&GM]’)의 작업을 바라보는 좋은 시각을 제공한다. 단토는 이 새로운 정의를 위해 샌드위치를 먹거나 치마를 다림질하는 등의 일상적인 행동과 구분할 수 없는 춤 동작을 연기했던 저드슨 무용단(Judson Dance Theater)을 언급했다. 일상에서는 샌드위치를 먹거나 치마를 다림질하는 행위를 특별하게 보지 않는다. 그 행위에 대해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용수가 무대에서 그 행동을 한다면? 현실 속의 동작을 무대에서 한다면 어떨까? (현상학자들이 말하는) 생활세계(Lebenswelt)의 장면이 비(非)생활세계에서 실현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느낄까? 현실과 꿈의 경계, 눈을 뜨고 꾸는 꿈, 바로 ‘깨어 있는 꿈’처럼 느끼지 않겠는가. 단토는 “이 꿈이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잠이 들었을 때 꾸는 꿈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김&마스의 작업은 어떤가? 그들은 생활세계의 일상적 사물(thing)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와 전시를 해오고 있다. 그들을 ‘깨어 있는 꿈’을 만들고 공유하는 듀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작업 대상은 일상에 속해 있는 것들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들은 볼링공과 손가락인형 기뇰, LED촛불, 아스피린, 기타(guitar), 여러 나라의 목각인형, 작은 장식용 흔들의자, 도자기, 휴지통, ‘NO SMOKING’과 ‘NO PARKING’ 안내판 등의 일상적 사물이나 일상적 문구를 작업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김&마스를 단순히 ‘포스트-뒤샹’이나 ‘뒤샹의 후예’, 또는 ‘팝아트’ 정도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미술영역으로 들어온 단순한 레디-메이드(ready-make)나 팝아트가 아니다. 그들의 작업은 일반적인 레디-메이드식 작업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중층적인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기성품을 그대로 미술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종결합(異種結合)을 통해 새로운 형태를 창안(創案)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렇게 결합된 개별 작품들을 전시공간에 감각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개별 작품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상호교류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새로운 전시의 장(場)을 만든다는 점이다. 전자는 작품의 범위이고, 후자는 그 작품들이 모인 전시의 범위이다. 그들을 뒤샹의 후예라고 볼 수 없는 것은 레디-메이드식 개념미술이 지닌 단순성을 넘어서서 작가의 의식(개념)뿐만 아니라, 물리적 숨결(제작)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작품을 쉽게 팝아트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많은 작품이 사물의 ‘대중’적(popular) 특징을 지시하기보다는 그것의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하여 새로운 느낌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일례로, 볼링공과 프랑스 손가락인형 기뇰을 결합한 (2018)에서 김&마스는 의도적으로 프랑스하면 떠오르는 전통적이며 상징적인 인형을 배제하고, 그러한 특색이 약한 기뇰을 택했다. (에서 손가락을 넣어 굴리는 볼링공과 손가락을 넣어서 인형극을 하는 기뇰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형태는 다르지만 유사한 맥락을 가지고 있어 흥미롭다) 프랑스 인형이지만, 프랑스를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는 인형. 기뇰과 유사한 인형은 영국에서는 펀치(Punch)로, 이탈리아에서는 브라띠니(Burattini)로, 중국에서는 포대희(布袋戱)로 불린다. 결국 이 인형은 지시대상으로서 사물이라기보다는, 작품의 구성체로서 사물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사물의 의회
김&마스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을 공간에 놓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음을 조율하듯이 개별 작품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새로운 시각적 음악을 들려준다. 하나하나의 개별 작품들이 지닌 특성보다는 그 개별 작품들이 전시 공간에서 놓여서 서로 관계망을 형성하며 링크되고 중첩될 때, 더 큰 새로운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해준다. 이렇게 조율된 공간을 듀오 중 한 명인 그레고리 마스는 ‘살롱’이라고 말했다. “사물을 재평가하는 공간의 일종으로 유지되고 사용되는 ‘살롱’(그 사물들이 바깥으로 나가 돌아다니는가는 다른 문제!), 일종의 자기충족적 체계로서의 살롱이라는 아이디어.” 클라우디아 페스타나(Claudia Pestana)는 그레고리의 언급을 기초로 ‘개념적으로 추방된 것들의 재활을 위한 살롱(Salon for the rehabilitation of the conceptually displaced)’이라고 김&마스의 작업을 정의한 바도 있다. 커피하우스의 진화된 형태로 19세기 프랑스에서 등장하여 확산된 ‘살롱’은 참여자들의 공론장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작업을 지칭하기에 적당하다. 하지만 살롱이 제국주의 전성기였던 벨 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대의 표상 중 하나라는 점과 부르주아적인 근사한 사교의 장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 명칭을 김&마스 작업 붙이는 것에 머뭇거리고 있다. 그들의 작업이 ‘제국주의’나 ‘부르주아’, ‘근사한’과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연결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차라리 ‘의회’라는 명칭은 어떨까? 더 자세히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개념화했던 ‘사물의 의회(Parliament of Things)’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까?
김&마스의 전시 공간은 혼종적인 조합(assembly)으로 이뤄진다. (여기서 assembly가 ‘의회’라는 또 다른 뜻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혼종적인 조합’은 ‘혼종적인 의회’라고도 부를 수 있다.) 작품들은 생활세계의 ‘대표/표상(representation)’으로 지위를 가지고 모여 있다. 다시 말해, 생활세계의 사물들이 각각 그 사물의 대표자 자격으로 전시장에 놓여 있는 것이다. 더불어 작품들을 비추는 전시장 조명과 창문을 통과하여 들어오는 자연광이 이 공간에는 존재한다. 더 나아가 감상자는 이 공간을 휘저으며 배회한다. 생활세계의 사물(작품)과 전시 조명, 자연광 등의 ‘비인간행위자’와 전시 공간을 배회하는 ‘인간행위자’인 감상자가 김&마스의 전시 공간에서는 혼종적인 조합을 이루며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그 네트워크 안에서 각각의 비인간행위자와 인간행위자는 자신이 가진 분위기(에너지)를 발산하며 공간의 느낌을 시시각각 변화시킨다. 여기서 ‘물체(object)’와 ‘사물(Ding[독일어], thing)’의 구분이 중요하다. ‘물체’는 어디에도 매개되어 있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사물’은 다르다. ‘사물’은 늘 다른 것과 매개되고 혼종되어 존재한다. 늘 다른 것과 매개되고 혼종된 김&마스의 작품은 그래서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라투르가 말했듯이 “‘Thing’이나 ‘Ding’[사물]이라는 오래된 단어는 예전의 의회(議會)를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사물’은 의견의 공론장인 의회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김&마스의 전시는 혼종 조합된 사물(작품)이 공간에서 다시 매개되고 혼종 되는 조합(의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의견(분위기, 에너지)을 발산하는 사물들이 매개되고 혼합된 ‘사물의 의회’라고 할 수 있다.

B-L-U-E : “We know where blue live”
클레멘스 크뤼멜(Clemens Kruemmel)은 김&마스의 전시 공간에 대해서 “관객이 느끼는 것은 […] 한 작품에서 다음 작품으로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모색의 흔적이다. […] 방금 전 본 것에 계속 추가되는 기분이 든다”라고 말했다. 그도 김&마스의 작품이 놓인 공간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느낀 것이다. 김&마스는 이번 전시에서 ‘크로마키(Chroma key)’ 개념을 도입한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가진 조합과 움직임(변화)을 항시적이고 극적으로 드러내고자 상징적으로 이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영상 합성을 통해 언제나 다른 것(영상)과 조합할 수 있는 크로마키 기술의 특성을 떠올렸고, 그 기술에 사용되는 블루스크린을 전시 공간으로 불러왔다. 그들은 블루스크린을 언제든 다른 영상으로 바뀔 수 있는 ‘순수한 배경’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그들의 작품이 새로운 조합을 통해 ‘늘 바뀔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바뀔 수 있기에 ‘순수하다’는 것을 내재한 발언처럼 보인다.
김&마스는 이번 전시에 《We know where blue live (우리는 파란색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다)》라는 다소 익살스러운 제목을 붙였다. 이 제목이 1970년대 영화 속의 상투적 대사였던 “We know where you live (우리는 네가 어디 사는지 알고 있다)”의 패러노메이저(paronomasia, 동음어, 유사음어를 쓰는 표현)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blue’와 ‘you’가 지닌 발음의 유사성에서 착안한 발상으로 보인다. 그들이 이렇게 상투적 표현을 재가공한 것은 (그들의 작품이 그렇듯이) 이러한 재가공을 통해서 새로운 감각을 환기(喚起)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전시 제목이 중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제목은 크로마키 기술에 의해 숨겨질 수밖에 없는 파란색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과 전시 공간에 ‘BLUE’가 숨어 있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 크로마키 기술을 직접 적용한다면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파란색은 자신을 숨기고 대신 합성된 영상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순간에도 이미 합성 영상 밑으로 숨겨진 배경에 블루스크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결국 ‘우리는 파란색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다.’ 
다른 의미는 숨겨져 있는 ‘BLUE’ 찾기다. 김&마스는 ‘BLUE’의 알파벳을 이종결합된 작품으로 구현해서 숨은 그림을 찾으라는 듯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 공간에 흩어 놨다(, , , ). 공간을 배회하며 우리는 언뜻 봐서는 알 수 없는 이 작품들을 하나하나씩 찾게 되고, 결국 ‘B-L-U-E’의 조합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문자로서 ‘BLUE(파란색)’이 전시 공간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파란색 찾기’는 사실상 의미의 단위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김&마스의 ‘B-L-U-E’는 의미의 최소 단위인 알파벳을 조합하라는 명령이고, 그들의 작업이 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앞서 말했듯이 크로마키 또한 조합에 대한 상징이다. 그와 함께 변화의 항상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크로마키가 의미하는 합성 영상 기술은 언제나 움직임을 갈망한다. 정적인 이미지를 크로마키 기술로 구현할 필요가 과연 있겠는가? 그렇기에 크로마키 기술은 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김&마스의 ‘실시간’적 변화 ―자연광 밝기의 변화에 따른 전시의 변화나, 관람객이 공간을 배회하면서 발산하는 에너지에 따른 전시의 변화, 각각의 작품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의 관계 속에서 시시각각 다른 느낌을 만드는 전시의 변화 등― 에 대한 표상으로 볼 수도 있다.
일상세계에서 매개되고 혼종된 사물은 김&마스의 손에 의해 조합되어 작품으로 변한다. 이 작품들은 전시 공간에 놓임으로써 다시 매개되고 혼종된 조합을 이룬다. 이 조합이 이룬 ‘사물의 의회’에서는 사물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형성되어 그 공간의 느낌을 시시각각 변화시킨다. 이 변화는 꿈처럼 초현실적이다. 그래서 그들의 전시를 ‘깨어 있는 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는 ‘사물의 정치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Dec. 2018
Seoul
글. 안진국(미술비평) Lev AAN(Art 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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