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 편집증적 파라다이스?

[큐레이터 김주원의 ‘요즘 미술’] 

2025. 02. 18 아시아투데이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20250217010008811


 <반야(般若) 키티> , 레진, 제스모나이트, 전등, 바니쉬, 아크릴 물감, 대리석, 철, 170 × 150 × 258 cm, 110 × 110 × 61 cm, 2024

'파라노이아 파라다이스(Paranoia Paradise·편집증의 낙원)'라는 상반된 개념의 모순적 조합이 눈에 띄는 전시가 지난해 11월 말부터 이달 초까지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렸다. 에르메스 재단이 기획한 이 전시는, 2004년부터 공동 작업을 해온 아티스트 듀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Gregory Maass)의 신작 60여 점이 소개되었다. 의학적으로는 편집증과 망상장애, 보편적으로는 피해망상을 뜻하는 단어 '파라노이아'와 낙원을 뜻하는'파라다이스'가 결합된 전시 타이틀은 '편집증의 낙원'으로 번역되어 이들 듀오의 작업 세계를 상상하게 했다.

모순어법의 전시 타이틀처럼 이 듀오의 작업 오브제들은 한국, 독일, 프랑스, 멕시코, 일본, 노르웨이 등 이들 듀오가 활동했던 특정한 지역의 시공간에서 사용, 폐기, 발견, 수집된 이질적인 물건들의 낯선 접합형식을 띠고 있다. 예컨대 영어 서예와 병풍, 미국대표 캐릭터 미니 마우스 동양자수 액자, 파리채와 꽃자수 족자, 조선시대 곱돌 약탕기와 스누피 인형, 그리스 술의 신 디오니소스 동상 모형과 한국산 맥주 상자모양 병따개, 안과용 눈 모형이 붙어있는 피클 저장용 대형유리병과 석고 피라미드 모형 위 스팸 캔, 고려시대 투각청자 풍 도자기와 투각 사이 꽂힌 담배개비 등이다. 예상치 못한 물건들의 이러한 의외적 접합은, 대량생산과 박물관적 사고,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낭만적 취향과 철학적 과학적 지식 등의 접합이기도 하다. 다양한 이종들이 얼기설기 엮인 듯 보이는 작품들은 견고하게 고정된 근대적 가치관의 위계에 대한 도전이며, 월드와이드웹 이래 가속화된 시대(들)의 욕망이 향한 좌표 모음일 수 있다.

이 같은 성격의 이들 듀오의 작업은 각각 한국과 독일에서 나고 자라 프랑스에서 함께 공부하고 한국과 유럽 등 여러 곳에서 협업해 온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1980년대 말 한국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파리로 간 김나영과 비슷한 시기 파리로 유학 와 철학과 미술이론을 전공한 그레고리 마스는 프랑스 국립미술학교(Ecole des Beaux-Arts)에서 만났다. 이들 듀오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서로에게 외국어인 프랑스어로 소통한다. 20대 중반을 전후로 '한국 여성'과 '독일 남성'이라는 이질적이면서도 '프랑스'와 '예술'이라는 공동의 사회 문화적 경험과 기억을 지닌 이 듀오의 작업 속 각각의 물건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같은 의미의 사물일 수 없다. 동양적 매체 고려청자와 병풍, 대중스타 엘비스 프레슬리와 데이비드 핫셀호프, 그리고 예술가 피카소와 요셉 보이스에 대한 두 사람의 시각은 한국 여성, 독일 남성으로서 다르고 예술가로서는 동일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가 아마도 이들의 작업 오브제가 사물 조합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이유일지 모른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자신들의 작업 방식을 '프랑켄슈타인화(Frankenstein ing)'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묘지에서 훔친 시체 조각을 절단하고 조립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고자 했던 미친 의사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와 유사해요. 여기저기서 수집한 사물과 아이디어를 자르거나 떼어내고 붙이고 재조립해 새롭고 낯선 결과물을 만들어내니까요. 여러 가지 사물과 현상을 수집하고 활용하되 잘 만들어진 것과 잘못 만들어진 것 사이에 동등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작업을 발전시켜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반야 키티(Kitty Enlightenment)'(2024)는 고대 로마신화 속 신 '야누스'를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공원 한구석에 버려진 대형 조형물을 주워 와 작품으로 제작하였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중정에 설치된 이 작품은 야누스처럼 앞뒤의 표정이 다른 새로운 헬로키티다. 일본의 캐릭터 회사 산리오에서 1974년에 출시한 오리지널 캐릭터인 '헬로키티'는 영국의 대표 캐릭터 '스누피'를 대항할 목적으로 만든 일본의 대표 캐릭터이자 대중문화의 상징 중 하나로 현재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원래 헬로키티는 소비자들의 감정 이입을 유도하기 위한 상업적 전략으로 입이 없는 캐릭터다. 반면 '반야 키티'는 울고 웃는 눈과 입의 표정을 넣어 희로애락을 보듬고 뛰어넘는 키티라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때가 탔다는 이유로 용도폐기 되어 버려진 키티의 몸체엔 독소를 빼는 부항 뜸 기구가 연상되는 큰 알전구를 달아 생명과 후광을 동시에 밝혔다. 순수함과 귀여움의 상징이던 캐릭터가 마침내 '깨달음(반야)'에 이르러 '반야 키티'가 되었다.

온갖 물건이 넘쳐나는 시대다. 백화점, 대형 마트, 홈쇼핑, 온라인 쇼핑몰 등 어디에나 물건들이 지천이다. 시공간에 따라, 한편에선 편집증에 가깝게 몰두했던 물건, 사물들은 한편에선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누군가에겐 불경하고 누군가에겐 행운의 표식이다. 우리에겐 파라다이스일 수 있지만, 한편에선 결핍 자체일 수 있다. 그동안 사모은 내 집 안의 물건들을 본다. 나의 결핍은, 나의 파라다이스는 무엇일까 하고. 모든 가치들이 동등하길 제안하는 이들의 작업을 떠올리면서.

/큐레이터·상명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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