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왜사기(倭沙器)


H양의 그릇가게 H's Tableware & Crockery
따뜻한 정종을 담아 마시면 좋을 것 같은 이 술병은 K작가가 부산 구덕골 문화장터라는 골동품 일일장터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뭔가 그럴듯한 이름의 이 장터가 언제부터 열리기 시작했는지는 알수없지만 (제가 부산에 살 시절엔 열리지 않았습니다.) 구덕운동장 담장을 따라 주말마다 열리는 골동품 장터라고 합니다.
얼핏보면 조선 청화백자 같이 코발트 안료로 그림을 그렸지만 조선백자에 비해 화려한 무늬와 정종병을 닮은 모양이 결단코 조선시대의 것이 아닌 이 술병들은 왜사기(倭沙器)라고 불리는 종류의 것으로, 일제 강점기때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규슈에 자기공장을 설립하여 실용자기들을 공장에서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일제강점기인 1917년엔 부산 영도에 “일본경질도기”의 분공장을 세워 값싼 물량으로 아직 가마 중심의 한국 전통 도자기 시장을 점령하였다고 합니다. 이 술병들은 그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특히 주둥이부분에 가락지처럼 굵은 테두리가 있고 그 아래 철사가 둘러져 있는데, 이는 술병의 짧은 부분을 잡았을 때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려한 이런 종류를 가락지 주병이라고 한답니다.
부산에는 일본의 흔적(혹은 잔재)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 중에 독특한 곳이 있는데 아미동 비석마을이라는, 한국전쟁 시절에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산비탈의 동네입니다. 당시 가난한 피란민들은 집을 지을 자재를 구할 수 없어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던 이곳의 비석들을 뽑아 집의 서까래로 쓰거나 디딤돌로 써서 집을 짓고 살게 됩니다. 지금도 비석마을을 걷다 보면 곳곳에는 일본이름이 쓰여진 비석들이 집 담벼락 사이에 갑작스럽게 끼어있고, 심지어 어떤 일본인들은 그곳에 와서 매년 제사도 지낸다고 하니, 이런걸 민간 차원의 교류라고 해야 할까요. 일본이 훤히 보이는 산 중턱에 미처 이장하지 못한 조상들의 유해를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그리고 이제 자신들의 선친의 이름을 담은 묘비들이 디딤돌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저 그 동네 언저리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 밖에 할 수 없게 된 일본인들과, 전쟁 와중에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해서 일본인들의 무덤 위로 움막을 짓고 삶의 터를 잡아야 했던 한국인들은 서로 다른 동전의 양면같이 시대의 비극을 나누고 있습니다.
예전에 광화문 뒤에 떡 하니 서있었던,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이었고 이후 한때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던 중앙청의 해체를 놓고 학계와 문화계가 충돌하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해체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일제시대 총독부 건물이 시내의 중심에 아직까지 서있다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고 말했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어찌됐든 중앙청 철거 후 광화문 너머로 멀리 북한산이 보이는 풍경은 이제 서울의 이미지가 되었고 그것이 꽉 막혀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답답하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우리 가정에서 밥그릇으로, 잔치그릇으로, 그리고 술병으로 오래오래 쓰였던 왜사기들이 주는 정겨움 또한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중앙청은 사라졌어도 우리가 한때 가지고 있던 부끄러운 역사의 비극 역시 이미 우리 삶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Mar. 2018
work by 황연주
May 2018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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